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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뻐서(못 나서) 이쁘다(못 났다) 하는 게 아니다.

나 아닌 내 2019. 12. 2. 11:24

어제는 그 사람을 앞에 두고, 이쁘다고 말 하더니,

오늘은 못 났다고 말 한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서?


"그 사람이 그 사람" 이라는 말이 맞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 라는 말도 맞다.

거시적(巨視的)으로 보느냐, 미시적(微視的)으로 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이다.


거시적(巨視的)으로 보기가,  미시적(微視的)으로 보기를 포함할 수도 있고 제외할 수도 있다.

미시적(微視的)으로 본 것을 종합하여 거시적으로 볼 수도 있고,. 그리 보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거시적으로 보건, 미시적으로 보건, 그 둘을 종합하여 보건 보는 자의 선택이 가능하다.

잠재적으로 가능할 뿐이라, 현실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고, 선택할 줄 몰라서 못할 수도 있다.


존재하는 것은, "항상 움직이며 존재하는 그대로" 있다.

단지 미시적으로 보면 미세한 움직임이 보이지만, 그 전체를 볼 수가 없다.

거시적으로 전체를 보면 미세한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보이느냐는 어떻게 보느냐의 산물이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미시적으로 보면 미세한 것이 보이되 크게 보이고, 거시적으로 보면 전체가 보이되 작게 보인다. 

다, 보기 나름이다.


"사람(물건) 이쁘다", (사람(물건)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두뇌에서 형성되는 마음이지, 그 이외의 무엇도 아니다.

사람이나 물건이 혹은 이뻐서, 혹은 못 나서, 혹은 밉게 생겨나 있어서 이쁘다, 밉다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아니다.

그 것을 무엇과 비교하여 보느냐,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하느냐, 그 작업은 사람(주로 타인)의 두뇌 속에서 이루어 진다.


그 두뇌 속 작없의 결과(히쁘다는 마음이나 보기싫다는 마음 등등...)를 통(通 =投射, 投影)하여 보니,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 두뇌 속의 작업이 달라지지 않는한 그 산물인 마음도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나 물건이 아무리 변하여도 여전히. (마음이 변하지도, 바뀌지도 않는다)

그 두뇌속 작업이 달라지게 되면 그 산물인  마음도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두뇌속 작업에 두 유형이 있으니,

첫째는 두뇌 속에서 기계적, 조건반사적인 경험과 학습으로 형성된 일종의 평판 [패턴]이란 것 에서 평판(意)이 생성되는 유형이고,(任意)

둘째는 그 사람의 정신(내 자신)이 주도하여 목적적으로 비교, 평가, 판단을 실행하여 생성하는 유형이다.(自意)


전자를 임의(任意)라 함은, 내가 둘째(自意)를 하지 않으면, 그걸 내 작품(自意)인 것 처럼 맡기는(任)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전자를 내가 주도하여 재검토하여 승인하면 자의(自意)와 같아지고, 그리 하지 않으면 임의(任意)일 뿐이다.

만약에 자의(自意)와 임의(任意)가 상치, 상충이 되면(상극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임의(任意)는 "내 뜻이 아냐"로 실효되고...


여기까지 이해하게 되면 현명한 정신이라면,

그 누구(무엇)를 이쁘다고나 못났다고나 보거나, 그리 보지 않거나에 있어서 합목적적으로 무한의 자유와 책임을 깨닫게 되리라.

"대상이 이뻐서, 못 나서 운운..."하는 일 없이, 어떻게 보고 대하는 것이 조화로움 속에 무난하게 사는 길인지만 살필 자유와 책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매한 수준이라면,

제 두뇌에서 "이뻐 보이게" 한 것을 모르고, 그 것이 진실로 이쁜불로 알고 희노애락에 빠져서 헤맨다.

제 두뇌에서 "밉게 보이게" 한 것을 모르고, 그 것이 진실로 미운줄로 알고 역시 희노애락에 빠져서 헤맨다.

그렇게(마음대로) 보이는 그대로 보기를 "멈추고 보기", 즉 지관(止觀)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