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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 먹기의 두 방향 - 차림과 차려 짐.

나 아닌 내 2020. 2. 15. 09:21

알기를 (음식을) 먹기에 비유하여 알아 먹기(알아 먹다, 알아 먹어라. 알아 먹지 못 한다)라 하기도 한다.

알기는 주체, 행위, 객체의 세 요소로 이루어 진다.


주체가, 유일한주체 스스로를 어찌 할 수는 없다.

하기는 주체가 선택하기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할 수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객체를 어떻게 정하느냐도 포함된다.


아는 일을 하는 (행위) 주체가, 아는 대상을 정하는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1. 내(주체) 스스로(自主적으로), 두뇌에다 말(질문이나 명령)을 수단으로 하여 의식을 만들고, 고치고, 바꾸고, 떠오르게, 가라 앉게 하는 식으로 -식탁 위에 음식을 차리듯- 능동적, 적극적, 목적적, 효율적으로 대상을 [차려서 아는] 방법이다.  

2. 내(주체)가 주도하지 않고, 그저 내 앞에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을 먹듯- 수동적, 소극적, 무목적, 피동적으로 [차려진대로 아는] 방법이다.

 

예컨대, 어린 아이가 "나는 자라서 무엇이 되어야 하나?"하고 질문해 놓고, 이 것 저 것을 떠 올려 놓고 안 다음에 "그래, 그 것이 좋겠다,

그 것이 되자"고 각오를 다짐하듯 명령하여서 소망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그저 어른들이 하는 소리를 들은 그대로 "싹수가 노랗다"거나, "크게 될 녀석"이라거나, "인간대접도 못 받을 놈"이라는등으로 연상되는

그대로를 알게 되는 방법도 있다.


위의 두 가지중 어느 방법으로 아느냐는 대체로 어린 시절부터 하나의 버릇으로 형성된다. (위인전을 읽게 하라는 목적적 이유가 짐작됨)

전자를 소위 [스스로 머리를 써서 알아차리는 유형]이라 한다면, 후자는 [피동적으로 머리에서 알려지는 대로 따르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유형이 어느 정도 고정적으로 굳어지면 성년에 이르고, 중년을 거치고, 노년이 되어서는 더욱 고착된다.


[알아차리는 형]이 굳어지면, 그리 하지 않기가 -익숙한 습성과 상반되므로- 불편하고 불안하다,

[알려지는 대로 형]이 굳어지면, 그리 하지 않기가 -생소하고 습관과 상반되기 때문에- 하기 거북하고 싫다고 회피된다.

고로,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각 자의 습성대로 인생을 운전해 간다.


자, 그런데 어떤 유형이 인생에 도움이 더 되고, 해로움이 덜 될까?

100%는 아니라도, 대체로 어느 쪽이 더 유리(또는 불리)할까?


희망을가져라,

방법을 찾아라,

선택을 잘 하라 등등의 소리를 드물지 않게 내기도, 들이기도 한다.

그 뜻을 알고, 그 소리에 상당하는 일을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내고 들일까?


예컨대 희말이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서, 어디에다 가지지? 라는 식의 질문조차 할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선택할 대상을 나열해 보자는 식의 명령조차 할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런 소리를 아무리 낸들, 들인들 소음공해일 뿐 이지.... 


두뇌 속의 나(我意識)를 상대로 "넌는 왜 백해무익한 마음에 붙어 있는가?" 하고 질문하고,

"내(自)가 너(我)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명령하지 못 하나, 안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