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네가 너무나 밉다.
더도, 덜도 아니게 아흡 글자의 나열이다.
읽으면 아홉 음성이 나오게 되는.
이 몸의 두뇌 속에서 떠 올라서 내게 들려 오는 -그래서 내게 알려지는- 소리인 경우도 전혀 다르지 않다.
그 형식(글자 모양, 음성 현상)은 꼭 같다.
그런데, 그 꼭 같은 형식에 무엇이 달라서 내 느낌(?)은 다르지?
그 보다 먼저 소위 "느낌"이 무엇인가, 무슨 뜻으로 사용하는 말인가?
1. 촉각(보기좋은 느낌, 듣기 좋은 느낌, 부드러운 느낌 등등...)을 앎을 지각(知覺)이라 하지 않고 느낌(感覺)이라 하는 경우이다.
2. 마음(상대적인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의 형식인 말인 意)을 앎을 -지식(知識)과 대비하여- 지의(知意), 지심(知心)이라 하지 않고
감지(感知)라 하는 경우이다.
제목의 아홉 글자를 형식 그대로만 보고 읽으면 아무 뜻도 없다.
그렇지만, 그 글자들에 뜻(두뇌속 意識)을 연결하여 이해하면, 그 뜻 그대로의 글(말)이 된다.
뜻 그대로의 말(글)일 뿐, 그런 말(글) 그대로의 사실일 수는 없다.
여기서 말(글)의 사실성이 문제될 수가 있다.
그 어떤 말(글)도, 그 형식으로는 그대로가 사실이다.
그 실질(뜻인 의식)로는, -그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의 두뇌 속에서는 사실이라도- 그 두뇌 바같에서는 형식 이외로는 아무 사실도 아니다.
이걸 제대로 이해하면 "말이 사실이니 아니니" 하는 시비나 논쟁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말(글)의 형식(음성, 글자)으로선 엄연히 사실이다.
말(글)의 실질(두뇌속 의식인 뜻)로서는, 그걸 두뇌 속에 가진 사람에게 있어서만 사실이고, 타인에겐 그 타인으로서의 뜻 여하의 문제일 뿐이다. (뜻이 없을 수도, 남의 듯과 달리 그 나름의 뜻이 있을 수도)
어쨌거나, "밉다"는, 어떤 대상을 딴 것에 비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여 거부, 배척, 적대, 공격, 파과하려는 등의 마음(惡意=악의라 읽지 않고 오의라 읽어야 하지만, 통상적으론 증오라 한다) 이다.
"너무"는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는 뜻 이고.
"나"는, 두뇌 속의 아의식(我라는 意識)에 붙은 이름이다.
종합하면 "(이 몸의 두뇌 속) 나는, 너(상대)가 너무나 밉다는 마음(憎惡心)이다" 이고,
그런 마음을 두뇌 속의 내가 알고 있다.
미워하는 자가 두뇌 속의 나(我)이면, 미움받는 상대도 두뇌 속의 너(汝)이다.
한 자리에서 상대해 있는 그 둘을 보고 아는 내(自)는 어디에 있는 무엇인가?
여기서 자각(自覺)과 착각(錯覺)이라는 갈림길이 발견된다.
자, 빈 방에 눈을 감고 지난 날의 기억을 떠 올려서 보자.
바로 "그 너를 미워하는 나와, 나 가 미워하는 너"가 떠 오른다.
그 둘을 보고 아는 내는 어디에, 무엇으로 있는가?
그 둘이 두뇌 속의 기억 (저편=彼岸)에 있다면, 그걸 보는 내는 기억의 건너 편인 여기(이편=此岸)에 있을 수 밖에.
기억 속의 나와 지금 그걸 보는 내는 아무리 가까운 거리로 있어도 서로 오지도, 가지도 못 한다.
이걸 이해하면 그로써 자각이고, 그러면 착각은 발생하지 않는다.
이걸 이해하지 못 하면 착각은 피할 수도 없고, 벗어나기도 매우 매우 어렵다.
내 자신이 불각되면 건너편의 나(我相)가 내 자신인 것 처럼 착각되기 때문이다.
착각에 빠진 사람이 "나는 네가 너무나 밉다"는 기억을 만나면, 지금 그런 상황속에 내가 있는 것 처럼 착각, 혼동에 빠진다.
자각한 정신이라면 "그게 언제쩍 일인데, 지금 그런 기억으로 남아서 무엇에 쓸모가 있는데!?"하고 조용히 타이를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