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의(意)"라는 글자의 뜻 부터 밝혀 두고 시작하련다.
사람의 두뇌 속에 형성되어서 그 어떤 정보(識 : 기억, 상상)에 부가(附加)되어 있는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형식인- 상대적인 언어 일체를 "의"라 하고, 통상적으로는 "마음", "의미"라 하기도 한다.
두뇌 속 의식(意識)을 불가(佛家)의 서적에서 배운 것과 필자 나름으로 보완(?)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전5식(前5識 :색성향미촉), 제6 어식(語 : 이름, 서술어), 제7 심의(心意), 제8 자의(自意)의 여덟 가지로.
그 중에서 제7과 제8이 바로 "마음(意)"이고,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제1 ~ 제6 까지의) 식(識)에 부가(附加)되어서만 존재한다.
예컨대, "큰(비교어)", "좋은(평가어)", "마땅한(판단어)", "취(取)할(선택어)", "하자(결정어)"등은 그 하나의 단어로는
아무 뜻이 없는 공허한(헛) 소리에 불과하고, 그 앞이나 뒤에 (예컨대) "큰(意)나무(識)"나 "나무(識)가 크다(意)"고 연결된 정보(識)가 있어야 소위 뜻(意) 있는, 의미있는 말이 되는 것 이다.
"自意"나 "恣意" 모두 우리 말로 읽으면 "자의"라는 같은 형식의 음성이 나온다.
그렇지만, 그 형식이 아닌 실질(두뇌 속의 뜻인 意識)로는 정반대에 가깝다.
"恣意的이면 自意가 거의 없고, 自意에는 恣意가 전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의(自意)는 제8 자의(自意)로서, 내가(다루는 주체로서) 스스로 다루기(만들기, 고치기, 바꾸기, 버리기)를 하자고 결정하고 다루어 낸 마음만을 지칭한다.
크게(넓게) 보자, 좋은 쪽으로 보자, 이해를 따져서 보자, 보편적 정의관으로 보자, 효율적으로 선택해 보자, 최종적으로 결정하자 등등으로 처음부터 끝 가지 내 스스로 주도하여 만드는 마음만이 순수한 [내 마음(自意)} 이다.
제7 심의(心意)는 내 스스로의 관여가 거의 없이 후천적인 학습적, 기계적으로 두뇌 속에 형성된 마음을 지칭한다.
내가 그걸 다루는 일을 처음부터 이제 까지 한 적이 없는 마음이, 이 몸의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는 것 이니,
남(타인) 에게는, 내가 다루어야 할 "내 마음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겠지만,
내 스스로는, 내가 만든 [내 마음}은 아니지만, 내가 다루어야 할 대상(他, 客)인 마음이라 해야 옳다.
[내 마음}이 아니고, 남의 마음도 아님을 확실히 구별하기 위하여 "나의 마음"이라고 하련다.
이걸 제대로 구별하면 "나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다루기가 너무나 쉽지만,
구별하지 못 하여 착각과 혼동에 빠지면 그 것이 [내] 처럼(錯覺), [내 마음}처럼(혼동) 되는 현상을
자의적(恣意的)이라고 한다.
자의(恣意)는 "제 멋대로 날뛰는 마음", "마음대로 날뛰게 방임됨" 이라는 뜻 이다.
비유하자면, 내가 소 등에 올라 타고 부리는 대로 소가 가는 것이 자의(自意)이고,
내가 소 고삐를 잡고서 끌려만 가면서, 내가 부리는 것으로 착각하여 벗어나지 못 함이 자의(恣意的) 이다.
여기서 [내 마음]과 "나의 마음"을 쉽게 구별하여 알아차릴 수 있는 비결(?)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내(주체)가 마음(意)을 대하고 있구나" 하고 알면 [내 마음] 모르면 "나의 마음"에 빠짐이다.
둘째, 시간적으로 내가 마음을 다루기는 고사하고 안다고 알지도 못 한 상태로 알고 있는 마음은 "나의 마음"이다.
세째, 공간적으로 내가 이렇게, 저렇게 검토해 보자고 하면 [내 마음], 아는 그대로에 멈추어 있으면 "나의 마음"이다.
넷째, 내가 스스로 그 마음을 누구의 무엇에 어떤 효율이 있겠는지 검토하면 [내 마음], 아는 그대로에 멈추어 있으면 "나의 마음"이다.
다섯째, 내가 스스로 이 마음을 다룰 수 있다고 하면 [내 마음], "어쩔 수 없다"는 마음에 머물면 "나의 마음"이다.
[내 마음}과 "나의 마음"을 제대로 구별하여,
자기 인생을 안전, 건강, 순탄, 조화롭게, 효율적으로 운전하려고 결심만 하면 전혀 어려울 게 없다.
그 결심을 하려고 하지 않음이 장애라면 장애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