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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아는) 주체와 보이는(알려지는) 객체의 동일시.(환상)

나 아닌 내 2023. 7. 14. 06:49

본다 또는 안다는 행위의 뜻인 관(觀)을,

그 주체의 앞에 붙여서 관주(觀主 : 보는 주체))라 한다면,

그 객체의 앞에 붙이면 관객(관客 : 보는 객체)이라 하게 되는데 소위 "말도 안되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보이는, 알려지는 행위의 객체가, 문법상으로는 스스로 보는 일을 하는 주체인 것 처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법에 맞는 단어로는 "객관(客觀 : (주체가) 객체를 봄" 이라 함이 옳다고 본다.

그렇다면, 객체를 보는 주체가 스스로를 보기(알기)는 "주관(主觀 : 주체가 주체를 봄" 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위의 "객관"은 실제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위의 "주관"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 이다. 

왜냐, 보는(아는) 주체가 볼(알)수 있는 것은 객체일 뿐, 주체 자신을 객체화하여 볼(알) 길(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행위의 주체는, 그 스스로를 그 행위의 객체로 삼을 수가 없다.

아는(행위) 주체는 그 자신을 객체로 하여 알 수가 없고,

물건을 손으로 잡는 주체는, 그 손을 객체로 하여 잡을 수가 없고,

금연을 하는 주체는, 그 자신을 객체로 하여 금연을 하게 할 수가 없다.

누군가를 미워(또는 그리워) 하는 주체는, 그 자신을 객체로 하여 미워하지 않게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참으로 기이하게도 수천년 유사 이래로 무수한 인류가 있었고 있지만,

위와 같은 행위 주체와 객체에 관하여 올바르게 알지 못 한다.

뿐만 아니라, 용어상 혼란이 실제로 그런 -용어와 같은- 사실이 있는 것 처럼 동일시에 빠져 있다.

 

보는(아는) 일에 있어서의 "객(客)"을 당사자(主)가 아닌 대상(客)이라는 뜻으로 쓸 때는,

관객(觀客)도 "(주체가) 보는 대상(객체)"이란 뜻으로 풀이해 써야지, 통상적인 용어인 "보는(觀) 손님(客)"

이라는 뜻 으로 씀은 오용이기 대문에, 혼란이 초래된다.

 

보는(아는) 자는, 그 보는 행위의 주체일 뿐 결코 "보는 손님"일 수 없기 때문이다.

"보는(아는)"을 고수하려면 그 뒤에 "손님"이 아닌 "주체"를 붙여야 하고,

"손님(客)"을 고수하려면 그 앞에 "보는(아는)"이 아닌 "보이는(알려지는)"을 붙여야 한다.

 

이런 글이 "단순한, 그리고 쓰잘데기 없는 말(글) 장난" 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적지 않으리라. 

그러나 온갖 일을 하는 주체인 [내] 자신을 알 수가 없고, 깨달을 수만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내] 자신을 모르는 줄 모르고 잘 아는 줄 알기 때문에 착각(錯覺)과 동일시(混同)에 빠진 줄도

모르고,

진실로, 진정으로 쓰잘데기 없는 의식적 혼란과 수렁에서 해탈하지 못 하고 헤매는게 어느

정도인지.........

 

"그리워(또는 미워) 하는 나'를 잘 다루어야 하고, 잘 다룰 수 있는 [내]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를

깨닫기(自覺하기)를 못 하고, 다루어야 할 '나'가 [내] 자신인 것 처럼 착각, 혼동에 빠져 있으니,

[내]가 있으나 마나 정도가 아니라, 그(착각인)동안은 차라리 [내]가 없느니만 못 하다.(잠들면 모르니까)

 

관주(觀主)로서 봄(主觀)을 제대로 올바르게 하고,

관객(觀客)하기를 제대로 올바르게 하려면,

주체가 정신이고, 객체가 의식이라는 것은 필수적으로 구별해서 알아야 한다.

 

[내]가 아는 모든 것(客)이, 이 사람(자기)의 두뇌 속 의식이고,(彼岸)

그 것을 아는 주체(主)가, 이 사람(자기)의 두뇌 속 정신으로,(此岸)

서로 보기(알기)는 가깝고 오, 갈 수는 없는(먼?) 사이로 마주하여 있다는 것을 알기가

참으로 어렵고도 쉬운 일 이다.

 

피안을 사바세계, 차안을 극락정토라 해야 올바르지만 사람들은 거꾸로 안다.

그래서 이미 극락정토(차안)에 있고 여기에만 있을 수 있으면서 그걸 모르고,

피안의 어느 구석에서, 없는 피안(극락정토)을 찾아서 구도, 명상, 참선에 나서는 착각과

혼동 속에서 헤매 지만.....

 

내가 그렇다는 것 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