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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自, 보는主체) -관찰(행위)- '나'(他, 보이는 客체), 자각과 착각.

나 아닌 내 2024. 10. 24. 17:22

사람들끼리 "자각하라", "착각하지 마라"는 소리를 하고 듣는 것을
더러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그런 말을 주고 받는구나...." 하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알고 넘겨졌었다.

그런데 말(글) 이라는 것에 형식인 "기호"(특수 음성, 글자)와 실질
인 뜻(두뇌 속 識과 意)이 구비되어야 형실공(形實共)인 말(글)이
라고 안 다음에는 "자각(自覺), 착각(錯覺)이라는 "형식"에 해당되는
뜻이 이 몸의 두뇌 속에 의식되어 있는지 여하?" 부터 학인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이 두뇌 속에는 없고, 사전에 뜻이랍시고 실려 있다는 것만
직접 알 수가 있었다,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은 그 단어들을 어떤 뜻으로 알고 쓰는지
물어 보았더니 대부분의 사람들 입에서 "자각이 자각이고, 착각이
착각이지..." 하는 소리만 나오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묻는 질문(형식)을 그대로 대답(실질인 뜻)인 처럼 태연히 대답
(동어반복) 하다니....

조금 "유식(有識)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自) 깨달음(覺)",
"(순수하지 않고) 섞인(錯) 깨달음(覺)" 이라고 번역만 해 놓고, 그걸
뜻 이라고 하니 그 또한 어처구니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사전에 어떻게 실려 있건, 사람마다 제가 아는 그대로의 뜻(?)
대로 쓰고 있으니 필자 또한 [내] 나름으로 뜻(두뇌 속 意識)을
만들어서 써 보려고 하였다.

이하 자각(自覺)과 착각(錯覺), 그리고 불각(不覺=자각 없음)의 뜻을
두뇌 속에 의식화 해 놓은 것을 여기에 글로 표현해 보이고자 한다.

자(自)에 두 가지 뜻이 있다.
1). 어떤 존재가 그 자체를 자(自), 자체 아닌 객체인 존재를 타(他)
라고 "자(自)/타(他)"로 구별하는 뜻 이다.
"주체(主).객체(客)"으로 구별하는 뜻도 같다.

2). 행위(예 : 관찰)를 스스로(自)와, 행위의 대상인 자의
피 행위(被)를 "스스로(自)/피동적(被)"으로 구별하는 뜻 이다.
"주도적(主)/종속적(從)" 행위라고 칭하여 구별하기도 한다.

각(覺) 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1). 눈, 귀, 코, 혀, 몸(5官)의 신경이 외부와 접촉함을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등- 각(覺)이라 하고, 그 각 순간을 앎을 지각
(知覺)이라고 한다.

2). 두뇌 속에서 여러가지 일을 하는 정신인 [내]가 [스스로,
스스로를 알 수 없는] 불변의 법칙(?) 때문에
가. 스스로를 알 길은 없지만,
나. [스스로가 있다]고 깨달을(覺) 수는 있다.
이 깨달음을 각(覺)이라 하기도 한다.

[내]가 두뇌 속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스스로] 알 길은 없다.
그렇지만, [내]가 아는 것(意識)을 내(주체), 아는(행위), 것(대상)
이라는 세 요소로 구별하기만 하여도 [내] 스스로가 있다는 것
을 깨닫기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아는 것의 결정적 요소는 것(알려지는 대상)인가,
내(아는 주체)인가?

1). "특정한 그 것"이 없으면 그 것을 아는 일 또한 있을 수
없지 아니한가. (그럴듯 하군)

2). "특정한 그 것"이 없어도, 딴 "것"은 무수하게 많으니
아무 것도 알 수 없지는 않쟎느냐. (그 또한 그럴듯 하군)

3). 아는 내가 없으면 그 어떤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아는 것" 이라는 것이 추호도 있을 수 없다.(그렇군)

[내]게 알려지는 것이 있다는 것은, [내]가 있기 때문이다.
[내]게 알려지는 모든 것은, 그걸 아는 [내]일 수가 없다.
그러니, [내]게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내] 아니라고
부인해야 정상이다.

"[내]는 알려질 수 있는 그 무엇과도 홀로 떨어 져 있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는 것이 깨달음(覺) 내지는 스스로
깨달음(自覺) 이다.

[내]가 빈 방에 혼자 몸을 눕히고서 두뇌에다 묵언(默言)으로
"오래 전 군 복무 시절을 떠 올려서 회상해 보자"고 하면 온갖
기억들이 회상된다.

[내]가 그 기억 속의 이등병 시절을 보다 보니, 장기복무 하사와
소위 "몸 싸움" 하던 장면, 중대장이 와서 "두 놈다 꿇어 앉아서
반성해" 하는 기막히고 통쾌한 명령을 받던 장면들이 보인다.

[내]게 보여서 알려지는 그 이등병이 누구의 무엇인가?
1), 자기라는 실제 사람인가?
2), 그걸 보고 있는 [내] 스스로인가?
3). 관찰주체인 [내]게 보여지는 피관찰 객체인 '나' 의식인가?

만약에 1) 이라고 답한다면 혼동이다.
2) 라고 답한다면 착각이다.
3) 이라고 답한다면 착각도, 혼동도 없지만 깨달음 까지는 아니다.

자기(實存) - [내](自覺) <->관(觀=행위)<-> '나'(의식계의 하나) - 자기
(實存)에서,
중간의 관(보는, 아는) 방향이 [내]쪽 이면 깨달음(覺), [내] 이전이면
실존적 탐구이고,

관 방향이 '나'(의식)이면 인식과 지식, 그 너머에로 향하면 실존적 탐험
이다.

[내] 스스로 깨닫지 못한 상태(?)를 불각(不覺), [내]아닌 '나'를 [내]
라고 여겨지는 상태를 착각, 그러다가 그게 [내] 스스로가 아ㅏ님을 알면
착각종료(불각상태), 그러다가 오직 소극적, 공제적 방법으로만
"순수한 [내] 스스로가 있구나 ..." 하는 깨달음을 자각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내] 스스로는 어디에, 어떻게 있는가?
보이는(알려지는) 것들과 왕래가 가능한가?
그 것들이 [내]를 붙잡고, [내]가 그 것들을 뿌리치고 할 수 있는가?

근심, 고민 그 속에도, 그 주변에도 [내]가 있을 수 없는데 "근심에
잠겨< 고민에 빠져 헤맨다니...."다, 착각에 빠진 줄 모를 뿐 이다.
번뇌에의 속박도 있을 수 없고, 그 속박에서의 해탈도 있을 수 없다
는 반야심경의 뜻이 이해된다.

깨달음을 찾아, 구하려 어디를 헤맨들 무얼 얻으리오.
[내]게 알려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내] 아니라고 부인하고 나서
무엇이 남아 있지? 거기가 바로 깨달음의 입구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