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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緣分), 인연과(因緣果)의 하나(分).

나 아닌 내 2024. 11. 19. 00:18

사전에 실려 있는 연분(緣分)의 뜻은 다음과 같다.
1.사람들 사이에 관계를 맺게 되는 인연
2.하늘이 맺어 준 인연
3.부부가 되는 인연
"연분(緣分)"을, 후술할 인분(因分)과 연분(緣分)을 합친 "인연(因緣)"
과 같은 뜻으로 실어 놓았다.

"緣分"을 우리 말로 직역하면 연(緣)을 나눔(分), 또는 몫(分)이라할수
있지만, 그 단어의 기원은 아마도 인도의 불교 유식학파에서 만들어
져서 중국 승려들에 의해서 한문으로 번역된 것이 아닐까싶다.

사람에게 일어 나는 하나의 일을 원인(因), 조건(緣), 결과(果)의
셋 으로 구별하여 그 하나마다에 분(分=나뉘어 진 몫이라는 뜻)을
붙인 것이 원인분(因分), 조건분(緣分), 결과분(果分) 이다.

그 중에 사람의 마음(意=주로 평가와 판단에서 파생하는 慾)을
원인분(因分), "이러 저러한 가상(假定的 상상인 識)이라면" 하고
조건(緣)을 붙인 것이 조건분(緣分), 내적(內的)인 조건(緣)의 외적
(外的)인 성취 여하와 그 정도에 따라서 발생하는 심리적 만족/불만
정도와 그로 인한 -기쁨, 성남등- 파생 결과를 결과분(果分)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는 두뇌속 인연, 예컨대 "월급300만원이라면(가상의 識인 緣分)
좋겠다(意인 因分)"는 인연(因緣) 을 합쳐서 인분(因分)이라 하고, 욋적인
조건상황을 연분(緣分)이라 하기도 한다.

이상 세 가지중, 두뇌 속에 원인인 마음(因)에 연결된 조건(가상의 緣)의
욋적인 성취 여하와 정도에 따른 예상 결과(果)가 구비된 순수한
내부적 인연과(因緣果)인 경우도 있고, 그 것이 두뇌 밖 실제 상황에 반영된
욋적인 결과(果) 까지 있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왜 가상(假想)을 조건(緣分)으로 삼게 되느냐 하면,
도래할지 여부, 여하가 불확정, 불확실하여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조건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래할 것이 확정, 확실하다면 "되면/안 되면" 이라는 등의 조건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연분"을 "인연" 운운함은 잘못된 용어임을 밝힌다.
또, 인연은 두뇌 속에 있을 뿐, 두뇌 외부에는 그 어떤 인연도, 조건도 없고,
단지 내부의 인연이 외부의 상황에 투사, 투영으로 반영될 때 그 것을
조건이니, 연분이니, 인연이니 한다는 것도 밝혀 둔다.

"연분이 맞아서, 좋아서 기쁘다"느니, "연분이 안 어울려서 짜증난다"느니
하는 말은, 외부의 실제 상황 정보(識)에 내부의 심리적 조건(緣)이 -비교,
평가, 판단되는 기준으로 적용되어- 비춰져서 발생하는 만족 또는 불만의
결과인 파생효과(기쁨, 또는 성남)를 뜻 한다.
[현상황조건/기대수준=만족/불만도=희노애락이라는 결과]

하나의 비유를 제시하자면,
취업하기 전 두뇌 속에 "원하는(因인 意)보수는 월 300만원 이상이면
(조건인 緣識) 좋겠다, 만족하겠다, 기쁠 것 같다는 예상결과(果))"가
순수한 내면의 인연과(因緣果)이고,

취업 후에 실제로 받은 보수액과 내면적 기대수준인 희망 보수액이 비교,
평가되면 조건(내면)이 반영된 상황(反緣)이 되고, 그 내면적 인연과가
현실적 상황에 투사, 투영되어 발생하는 심리적, 육체적 결과가 소위
"기쁜(만족스런, 행복한) 미소", "불만스런 짜증, 성남" 등 이라는 결과
(果分)이다.

그런데 결과(果分)의 욋적인 일부(표정, 발언, 행동)는 드러나서 알기 쉽지만
내면의 인연과(因緣果) 대부분은 드러나지 않아서 [내](그 본인의 정신)
스스로도 알기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모두가 그(욋적인 남, 타자) 때문이야"라고 여겨지는 속단에 빠지기
쉽게 된다.

"연분"을 "인연"이라고 아는 것 부터가 잘못의 시작이다.
두뇌 속 원인인 마음(意)을 인분(因分), 그 마음이 연결된 조건부 정보
(緣識)를 연분(緣分), 그 둘(因분과 緣분)이 실제 상황에 반영된 결과가 과분
(果分)이라고 정확히 알면 그런 오인, 오해, 오판은 사라지게 된다.

누군가가 "고마운 짓"(緣分)을 해서 고맙고 기쁜 것(果分)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고약하고 미운 짓"(緣分)을 해서 얄밉고 성나는
것(果分)이 아니다.

"고마운"/"고맙지 않은"/"얄미운"은 두뇌 밖 그 누군가에도, 그 사람이
한 짓에도 없고, 오직 [내] 앞의 두뇌 속에만 있는 상대적 언어인
마음(意)이 원인(因)으로 있을 뿐이다.

그 마음(意)은 누군가의 행위가 있기 전에 이미 두뇌속 그 어떤 정보(識)에
연결되어 인연(因+緣)을 이루고 있었다가,
그 누군가의 행위를 만났을 때 그 냇적 조건이 반영되어 일어 난 것(反緣)
이 그 누군가의 짓(緣)에 반영된 마음인 "고마운"등등의 결과(果分)인 마음이다.

두뇌속 기존의 가상(識)인 연분과, 외부에서 새로 만난 현상(識)의
둘이 서로 비교되어 만족/불만과 그 정도를 결과(果分)로 형성한다.

간단히 말 하자면, 그런 짓을 만나기 전 부터 그런 짓을 만나면 그런
마음이 생길 것으로 예정(因)되어 있었던 것 이지, 그런 짓을 만나면서
, 그런 짓 때문에 비로소 그런 마음이 생긴 것(果)이 아니다.
소위 선입견(先立見)과 매우 유사하다.

남이 그런 말 해서 내 (아는) "기분이 나쁘다" 함은 틀렸고, 그런 말
듣기 전부터 그러 말 들으면 그런 (나쁘다는) 마음(惡意)이 발생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해야 맞다.

똑 같은 상황에서 똑 같은 상대로 그런 말을 들은 두 사람중 하나는
웃고, 하나는 성나는 원인이 무엇 때문일 것 같은가?

예컨대, 군대에서 동향, 동성동본, 학교동창등을 만나면 "반갑다"는
마음(意)이 생기는 것은, 만나고 부터 생긴 마음이라기 보다, 만나기 전
부터 "만나면(연분이 닿으면) 반가워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 이다.

인연(因緣)이라고 쓰지, 연인(緣因)이라곤 쓰지 않는 이유도 그래서이리라.
내부에 원인인 마음(因分)이 먼저 있어서, 외부에서 연분에 해당되는 대상을
만나면 "그 연분에 마음이 끌린다", "그 연분이 마음에 든다" 하는 일이
생기는데 그게 마로 "인연맺히기"이다.

그 외부에서 만나는 대상이 내면의 조건과 맞지 않거나 상반되면 "그 연분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 "그 연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연분에 마음이
떠났다", "연분이 아니다" 하는 말이 생기는데 그게 바로 "인연 끊어지기" 이다.

두뇌 속 "어떤 마음(意=因分)이 연결된 가상적 조건(識=緣分)"인 "인연(因緣)"과
유사한 정보(識)가 외부에서 새로 입력되었을 때
가. 인연에 맞다, 인연에 어울린다, 좋은 인연(깜)이다.
나. 인연이 안 맞다, 인연에 어울리지 않는다, 인연이 아니다 하는 일이
두뇌 속에서 일어 남을 반연(내적인 인연이 욋적인 조건에 反影됨)이라 한다.

여기서 말 하는 "인연 맺히기"와 "인연 끊어지기"는 [내] 스스로 주도하여
목적적으로 [맺고], [끊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 속에서 학습된 그대로
기계적, 반사적으로 일어 난다.

그래서 [내]가 그 "인연"을 상대로 스스로(自) 맺지 못 해서, 혹은 스스로 끊지
못 해서 고뇌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인연을 벗어나고 싶다고 온갖 애를 쓰지만 성공하지 못 한다.
왜 그럴까?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인연의 정체를 제대로 모르고 엉터리로 알기 때문에 제대로 다룰 수가 없다.
2). [내] 스스로의 자각을 못 해서 본래 불변의 자리(獨存)도, 본분도, 능력도
모르기 때문이다.
3). 위의 2) 때문에 인분(因分)을 [내] 스스로인 것처럼 칙각에, 그 인분의 주인
공인 '나'의 상황을 [내] 현실인 것처럼 혼동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자의 글을 자주 접하신 독자라면 위의 세 가지 이유는 이미 해소되었
으리라.
1). 인(因), 연(緣), 과(果) 및 연분(緣分)의 정체를 이미 알 것 이고,
2). [내] 스스로가, [내]게 알려지는 것이 있는 곳(彼岸)에 여럿이 함께 있지 않고,
순수한(맑은) 정신으로 여기(此岸)에 홀로 있으면서 인연과를 포함하여 [내]게
알려지는 의식계를 [내] 스스로의 말(自意)로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고 알고,
3). 그 어떤 착각이나 혼동에도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의 삶을 안전, 건강, 순탄, 조화롭게 운전해 감에 필요하고 유익한 가상적
정보(想識)에 마음(意)을 연결하여 [인연맺기(連緣)]를 하고,
그런 인연이 필요없거나 유해하다 판단되면 [인연끊기(絶緣)]를 하면 그만이다.
잇지도 끊지도 못한 미련(未緣) 같은 것이 남아서 골치 썩일 일 없다.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일도 아니고, 누구의 방해를 받을 일도 아니다.
그저 두뇌 속에서 묵언(默言)만으로도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이해하게 되면, 이제 부터는 누구라도 내부의 인연(의식)과
그 것을 어떻게 통제하여 실생활에 유익하게 활용할지 그 완전한 자유와
전적인 책임을 깨닫게 되리라.

특히 어떤 사람, 일, 상황을 조건삼는 일(조건附)은, 두뇌 속의 마음이 그
원인(因)임을 몰라서 조건(즉, 연분)만 일방적으로 문제삼고 해결불능에
속수무책이 되어 헤매던 고뇌를,

그 원인인 마음(상대적 언어인 意)을 -새로 만들기, 고치기, 바꾸기,
포기하기등- 다루어서 해소하기가 너무나 쉽다는 것을 발견(?)하면 그 공덕이
실로 어마 어마하리라.

[내] 자각이 없으면 그 어떤 인연 속에 [내]가 있는 것 처럼 착각에 빠져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을 치지만, 실제로는 이미 빠져있지 않는데 벗어남인들
어찌 있을 수 있으리오.

"그리운/미운 사람을 그리워/미워 하는 나"는 그걸 대상으로 보고 있는 [내]가
아니다.
그러니 [내] 어찌 그런 '나'에 빠질 수 있으며, 그런 '나'를 벗어날 일인들
망상이나 가능할 뿐, 올바르게는 상상조차 할 수 있겠는가?

해탈하려 애 쓰고 헤매고 다니지 마시라.
[내] 이미 지금 그대로가 "소각/해탈"없는 대자유에 있거늘......

모든 사람의 정신은 이미 [붓다]의 정신과 같지만, 스스로 깨닫지를 못 하니
중생인 것 처럼인 꿈 속에서 헤맬뿐이라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