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더러 하는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말이 있다.
그 제자 [플라톤]과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 텔레스]에 의하여
일부만 전해져 오는 그에 관한 약간의 이야기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위대한 스승이라 할만 한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마도 번역의 오류가 아닐까 짐작되는 "나는 모름을 안다"나,
"먼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듣고 쉽게 이해할 사람은 아직도
드물다고 본다.
올바른 앎을 만들어 내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한 산파술도 물론이고.
- 나는 모른다고 안다.(不知를 아는 지혜)
"나도 모르고, 사람들도 모른다는 점에선 같다, 다만 나는 모른다고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제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위의 말을 이해하려면 "앎(知)"과 "모름(不知 또는 無知)"이라는 말의
뜻(두뇌 속 意識) 부터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무엇(어떤 것)을 "앎", "모름"이라고 칭하는지 알 수 있으려면.
그래야 그 것을 떠 올려서(顯) 보고(觀) 알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앎(또는 모름)"이라 함(名)은, 두뇌 속에서 등장해 있거나 저장되어
있는 의식(意識)을 떠 올려서 아는 일을 하는 정신(곧 [내] 스스로)이,
제 앞에 떠 있는 의식(意識)을 대(對)하여 보는(觀) 일을 아는 행위(知)라
하고, 그 행위의 결과물(?)을 앎(知)이라 한다(여기 까지가 語識)
이런 앎(識)은 "사람이 살아 감에 있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선택, 결정함에 필수 불가결할 정도로 중차대한 가치가 있지만, 동시에
그걸 올 바르게 활용하지 못 하면 역시 중차대한 역효과가 초래되는 수도
있다는 마음(意)"이 연결된 의식이란 것이 필자 나름의 뜻이다.
"모름"(不知 또는 無知)은, 두뇌 속의 정신 앞에 그 어떤 의식이 전혀 등장
해 있지 않아서 알(知) 수가 없다(無)는 뜻이다.
"무식(無識)"은, 그 무엇에 관한 정보(識)가 두뇌 속에 없다는 뜻으로,
두뇌 속에 정보가 있지(有識)만 떠 올라 있지 않아서 모르는 무지(無知)
와는 다른 뜻이다.
물론 무식(無識)이라서 부지(不知)인 경우(無識 無知)도 있지만....
유식(有識)이지만 -극히 일부만 떠 올라서- "무지의식)"인 경우도 있다.
소위 "잠재의식 운운" 함은, 그 의식이 있지만 수면(?) 가까운 아래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정신이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不知)는 뜻이다.
전혀 떠오르지 않는 것은 "심층의식"이라 하고.......
"모른다고 앎(無知를 知)"은, 두뇌 속의 정신 앞에 그 어떤 의식이 등장해
있을 때, 그것이 실상(實相)을 반영하는 정도에 "부족이 있음을 알고"
"(그 부족분을) 모른다"라고 안다(知)는 뜻이다.
예컨대, "그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어떤 성격(내면)인지 모른다"는
소리는 그 "모름을 안다"는 뜻이고, 그런 말이 두뇌 속에 전혀 없으면
"모름을 모른다" (不知無知?)라고 해야 하나...
그 어떤 것의 실상(實相)을 거의 그대로 아는데 100개의 정보(識)가
소요된다고 가정하고, 당장 [내] 앞에 90개의 정보만 떠 올라 있을 때
가. 그 10%를 모르는 줄 모르고, "다 안다" 하는 수도 있고,
나. 그 10% 모름을 알고 "약간은 모른다"라고 하는 수도 있고,
다. 그 10% 모름을 중대하게 여기고 "너무 모른다, 거의 모른다" 하는 수도
있다.
전혀 모름과 위의 가를 합친 것이 소위 "모름(不知)"이다.
그 10% "모름(不知)을 앎(智)"(逆으로 말하자면 90% 앎)을 "모른다(無識)고
앎(知)"이라 한다.
전혀 모름이 아니고, 완전히 앎도 아닌 것이 "모른다고 앎"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의 두뇌 속에 있는 정신이 깨어나서 활동하고 있는
순간에, 그 앞에 등장해 있는 의식(意識)만을 알 뿐, 그 이외의 것은
모른다"라고 아는 것이 바로 [모른다고 앎(無知에의 智慧)]의 원형이다.
"배우자와 60년 이상을 함께 살아도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너무,
너무나 많다"는 푸념 섞인 소리에도 철학적 탄식이 들어 있는 건지....
하물며 불교 유식학에서 주장하는 "일체유심(一切唯心)"을,
"[내]가 아는 것은, 모두(一切)가 오직(唯) 그 순간 내 앞에 등장해 있는
마음(心 = 意識) 일뿐"이라고 해석하는 필자로선 "그것 말고는 전혀
모른다"라고 아는 범위가 엄청나게 광범하다 할 수 있으려나.....?
필자가 알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면, 그런 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아마도 모른다는 것을 거의 모르는 것이 아닐 수 없으렷다?
이점, 기원전에 살았던 [쏘크라테스]의 위대한 지혜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2. 먼저 너 자신을 알라.(先智自)
사람들은 온갖 것을 많이도 알고 있지만, 그것들을 아는 저 스스로(自)
를 모르는 줄도 모른다.
(저 스스로가 아닌 것을 저 스스로라고 아는 맹신에 빠져 있다=註, 필자)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만큼은 지혜롭다.
"너는 누구냐?" 물으면, "나는 나다"거나,
"나는 이름이, 키가, 부모가, 형제가, 배우자가, 가족이, 고향이, 주소가,
취미가, 특기가, 학력이, 경력이, 성격이, 장래 희망이, 실력이, 능력이
운운...." 하기를 끝이 없듯 주절대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나"라고 말하는 네가 무엇이냐? 하고 다시 물으면,
또 처음으로 돌아가서 같은 대답을 한다.
"그게 나 라니까"라고,
"그게" 아니라, "나"라고 자칭하는 자가 무어냐고 묻는다니까?" 하면
다시 또 "그게 나 자신이라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기에 기진맥진한들...
앎이 가능하려면 다음 세 요소가 필수적이다.
a. 아는 일을 하는 주체,
b. 주체가 아는 일(행위),
c. 아는 일의 대상(객체)
위 a, b, c는 연결은 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b(아는 일) 없이도 a는 존재한다.(다만 a 없이는 b가 있을 수 없다)
b(아는 일) 없이도 c는 존재한다.(다만 c 없이는 b를 할 수 없다)
a와 b와 c는 연결되기는 하지만 서로 통합되지는 않는 각각이다.
위의 풀이에서 a(아는 주체)와 c(알려지는 객체)는 같을(同) 수도,
하나(一) 일 수도, 즉 동일(同一)할 수가 없다.
단적으로 "네가 나와 100% 같다(同)"거나 "너와 나는 하나(一)"라고
확고하게 믿고 말하더라도 헛소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나를 안다"는 말과 "내가 내 자신을 안다", "나가 나를
안다"라고 하는 말의 뜻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면 그 뜻이 같은 줄
맹신에 빠지게 된다.
- "내 스스로(自)가(주체로서), 내게 알려지는 나 라는 의식(객체)을 안다",
- "내 스스로(自)가 (주체로서), 내게 알려지는(?) 내 스스로(?)를 안다"
- "아는 주체일 수 없는 나(我意識)가, 나(我) 또는 [내]를 객체로 삼아서(?) 안다"
위의 1을 제외하면 나머지 모두는 어째 기괴망측하지 않는가?
위의 2는 [내], 즉 아는 주체가 둘 이라야 동시에 주체와 객체가 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지만, 모르고 있다.
위의 3은 [AI]와 같은 기계적 구조물로써 스스로 아는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위 1의 경우는 내(아는 주체인 정신)와 나(알려지는 객체인 의식)를 구별하여
알고 하는 말이면 맞고, "내가 곧 나"라는 식으로 알고 하는 말이라면 위 2와
같이 틀린 말이다.
[쏘크라테스]가 왜 "먼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는지 자세한 이유는 전해 오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도 위 1과 2를 구별해서 알고 한 말이 아닐까 짐작할
따름이고....
어쨌거나, [내]가 "나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착각에 빠져서 본분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바로잡는데 굉장히 중요한 교훈이라고 본다.
예컨대, 내면의 "가정파괴범인 나(我意識)'를 통제해야 할 [내] 스스로(自)가
'그런 나"라는 착각에 빠져서 펼쳐지는 인간사 희, 비극이 너무나 많으니까
말이다.
- 산파술(옥동자 같은 결론을 얻는 지혜의 발휘)
건강한 아이 여하는 먼저 포태 중에 정해지지만, 출산 과정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잘못하면 크게 다쳐서 장애, 불구, 사망할 수도 있으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일에 어떤 의사(意思)를 형성하는 일도 태아의 잉태, 태교,
출산과 유사하다.
그 어떤 의사결정 과정을 출산하는 일에 비유하고, 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술을 [쏘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 한다.
산파술이 훌륭하면 태아가 무사히 출생하지만, 산파가 없거나 기술이
미흡, 불량이면 태아의 출산이 위험해지듯이 효율적인 의사결정은
커녕 부작용, 역효율을 초래할 의사도 예방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산파술은 어떤 것일까?
결론만 말하자면 "무한의 지혜를 내장하고 있는 두뇌를 상대로,
하나의 주제에 관하여 질문을 연속으로 하여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 없다(즉, 옥동자가 출산했다)고 판단될 때까지 계속 문답하는 방법이다.
타인에게도 -그 정신이 협력만 한다면- 가능하고, 본인에게도
가능하다.
본인에겐 무언의 [말]과 상상만으로도 문답(聞答)이 가능하니까.
"아무개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다" 하는 자기나 타인의 소리를 듣고,
그냥 방임해 두면 울화병이 나서 죽을지도 모른다.
미워할만한 이유야 있겠지만, 미워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그런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
그럼 이제라도 생각해 보고 알 수는 없는가?
"귀챦아서 하기 싫다",
하기 싫으면 안 하고, 하고 싶으면 하고, 그러면 그만인가?
"누구나 그렇게 살던데...",
남이 그렇게 살면 자기 인생도 그렇게 살 수 밖에는 없는가?
"몰라, 몰라 귀찮게 하지 마",
도대체 네 스스로가 누구의 무엇인가?
네 스스로 어떤 일을 해야 하고, 어떤 일을 안 해야 마땅한가?
네가 "그 미워하는 마음인가",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할 정신인가?
-그 대답들은 읽는 이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고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