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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또는 그의) 마음"을 [내]가 다 안다, 맞지만 틀린 말 이다.

나 아닌 내 2024. 11. 26. 00:44

[내] 스스로 안다(知)는 것(이 두뇌 속 의식)의 정체(두뇌 속 의식)를 제대로
안다면, 위의 제목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단순해서 쉬울 것 이다.

이 두뇌 속에 있는 "너(또는 그)의 마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의식(意識)을
아는 일은, 누구에게나 그리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또는 그) 사람 마음이 어떨까(어떤 마음일까)? 하는 의문에,
"아마도 내지는 틀림없이 여차 여차한 마음일 거야(짐작) 하는 마음"이
형성되는 일이 있고, 그렇게 형성된 마음이 이름은 "저(또는 그) 사람 마음"
이니 "저(그) 사람 마음을 내가 안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저(그) 사람 마음"의 뜻을 그 사람의 내면(두뇌 속)에 형성된
마음(意識)이라고 알고 있으면, 그걸 짐작이나 추리야 할 수 있지만 그 짐작
이나 추리 작업과 그 산물 또한 이 두뇌 속에만 있는 것이니,

"저(그) 사람 두뇌 속에 있는 마음"을 [내] 어찌 알 수 있겠느냐!?"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럴 때는 "저(그) 사람 마음 내가 확실히 다 안다"는 확신도 틀린 말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이상은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는 과정에서 화합 또는 불화를 초래하는
중대한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내 이미 네 마음, 그 심뽀, 감추고 있는 의도 훤히 다 보여서 안다",
"나는 네 속에 든 네 마음을 알지 못하는데, 너는 무슨 수로 내 속에
든 마음을 안다고, 어림 반푼어치도 안 되는 소리 작작 하네..." 하는
식으로 심한 언쟁을 펼치기도 하는 원인도 쉽게 이해되리라.

한 사람은 제 두뇌 속에 있는 "너의 마음"을 안다고 알지만,
그게 상대방의 두뇌 속 마음이 아니라, 제 두뇌속 마음인줄 모르고 있다.

반면에 상대방은 제 두뇌속 마음도 정확히 몰라서 "내 마음 나도 몰라"
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데, 남이 어떻게 내 마음을 안다고...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알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추리나 짐작"이라는 것의 능력 수준이 사람에 따라서 크게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저 사람이 어떻게 내 마음을 귀신처럼 알고 있지?"
하는 경우도 더러 있게 된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남의 두뇌 속에 있는 그 사람의 마음 자체를
알 길은 없다.
그 사람의 마음을 짐작이나 추리의 방법으로 제 두뇌 속에 만든, 엄격히
말하자면 이름만 "너(그)의 마음"일 뿐, 실질은 제 마음을 아는데
예외는 없다.

자, 그렇다면 단순하고 쉬운 일을 왜 복잡하고 어렵고 힘들게, 그리고
부작용과 역효과가 적지 않은 "너의 마음 운운"하는 시비가 발생할까?
정신적 우매함 때문이다.

각 자가 제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지 말지는 스스로 결정하고,
상대의 물음에도 그대로 응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하여 실행하고,
상대 또한 그리 하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제 마음을 감추고, 위장하는 이유가 있다.
대체로 편협한 이해(利害)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면 "손해 볼 거다, 위험할 수 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감추거나 속이는 게 낫다"는 마음에의
집착이다.

자기 마음이 그러하니 타인들도 그러리라는 연상적 추리까지 믿게
되면,
정직한 사람은 드물고 허위나 조작을 하는 사람이 많게 된다.

"정직하면 나만 손해"라는 마음이 거의 일반화된다.
일종의 정직 불안증, 공포증에 빠진 사람도 더러 있더라.
게다가 제 버릇대로 남도 거짓말을 한다는 확신에 빠지기도 한다.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기가 불안하고 두려우면,
침묵하거나,
나는 마음표현을 하지 않겠다는 정도로만 말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서는, 약간의 불리 정도는 각오하고 진심을 표현해
보는 용기도, 그 결과를 직면하고 나면 바람직할 텐데....

남의 마음을 섣불리 짐작한 실제론 제 마음으로, 남을 상대하다가
개인적 낭패(속았다고 후회)를 보거나 불화를 초래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