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위의 주체는, 그 스스로(自) 할 수 있어야 (주체가) 될 수 있다.
그 스스로(自) 할 수 있는 행위는, 그 스스로 하건, 하지 않건 그가 주체이다.
그 스스로(自) 할 수 없는 행위는, 누가 뭐라고 알고 말하건 그것은 주체가 아니다.
정신이 정상인 사람의 모든 정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선택을 할 수 있다.
선택을 하느냐, 안 하느냐도 선택이 가능하다.
선택할 수 있다, 또는 없다는 판단도 선택이 가능하다.
어떤 경우에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고 선택하건, 어떤 경우에는 전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선택하건 그 어느 쪽도 선택이 가능하다.
이상은 사람의 정신이 깨어 나 있으면서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영원히 불변인 진리이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절대적, 불변의 진리이지만, 그걸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왜 그럴까?
그 정신이, 스스로 깨닫고(自覺하고)서, 스스로 선택한다고 알고 말하면서 선택하는 일은
극히 드물고,
그 사람의 두뇌 속에서 기존의 의식적 사고로 형성된 의사를 피동적, 소극적으로 따르게
되는 선택되어짐에 빠지는 일이 거의 대부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소위 "마음 먹기"라는 것을 사람의 무엇이 할 수 있는가?
오직, 그 사람의 정신만이 마음먹기를 할 수 있다.
단지, [자주적]으로 하느냐, "피동적"으로 하여지느냐의 두 유형뿐이다.
그 두 유형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정신이니 선택할 주체임이
자명하다.
엄연히 주체이긴 하지만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완전히 누리지 못하고,
의식계에서 형성되어 알려지는 그대로를 따르는 "선택의 자유"가 마치
제 스스로의 자유인 것처럼 오인, 오해, 오판에 빠지는 사람(그런 정신상태)이
결코 드물지 않다.
예컨대, 두뇌 속에 형성된 "이룰 수 없는 사랑(판단)"이라는 한 개 의식을
대(對)하여 [버릴까, 탐할까를 선택할 자유]가 엄연히 있지만,
그런 [선택할 자유]를 모르면 두뇌 속 의식의 달콤한 맛(意味)에 도취되어
"선택된 의식의 자유"에 빠지게 된다.
왜 원망하고 미워하고 증오할까?
남의 책임(나의 무책임), 욕하기(통쾌) 저주하기(바람직?)에 따르는 맛(意味)
이 그 얼마나 달콤한가?
그렇지만 현명한 정신은 될 수 없거나, 할 수 없거나, 하지 않느니만 못한 일을
추호도 원하지 않는다.
왜냐, 바라는 일이 안 되고, 못 하고, 했다간 혼날 맛이 너무나 혹독하다고
아니까.
모든 근심, 걱정, 고민은 불행과 실패, 실망, 좌절의 씨앗이 된다.
그렇지만 그 결과 이전의 맛은 너무나 달콤하여 도취에 빠지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