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성공에는 [ ] 테두리를 하고 재미에는 " " 테두리를 했는가 하면,
바라는, 목표하는 바와 그 걸 이룸은 어느 정도 구체성이 있어서 그런(성공/실패)
것이 실제로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는 뜻 으로 [ ] 로 테두리를 하였고,
재미라고 할만 한 것은 수다한 사람들이 사용하지만, 무엇을 재미라고 하는지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불가능 할 정도로 어렵다.
언제, 어디의 무엇에다 재미라는 딱지를 붙여서 보는 사람에겐 그 것(거기)에
재미가 있는 것 처럼 보이(여겨지)지만,
그런 딱지 없이 보는 사람에겐 재미라 할만 한 것을 추호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허황되다, 가짜라는 뜻으로 " "를 테두리로 하였다.
요약하자면 [성공/실패]는 누구나 일반적으로 알기 어렵지 않지만,
"재미 있다/없다"는 그렇게 말 하는 사람이 아니고선 무얼 뜻하는지 알기 어렵다.
[성공/실패]는 실속과 연결되지만, "재미유/무"는 실속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다만, [성공]에다 "재미 있다"를, [실패]에다 "재미 없다"를 딱지로 붙여서 볼
수도 있고, 그걸 반대로 붙여서 볼 수도 없지는 않다는 것만 언급해 두고자 한다.
여기서는 이왕이면
[성공]도 실속있는 "재미'도 누리려면 어찌해야 할까,
[실패]를 허황하게 "재미"삼듯 살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할까를 검토해 보자.
먼저 "한치 앞도 모두 몰라, 다 안다면 재미없지"(김국환이 부른 [타타타]
노랫말의 일부분) 하는 말의 뜻 부터 확인하고자 한다.
[내]가 스스로 아는 것은, [지금] 그 순간에 [내] 앞에 떠 올라 있는 의식(意識)
뿐 이다.
첫째, 대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의식말고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뜻이 일체유심
(一切唯心=唯識)이다.
둘째, 의식이라도 [지금] [내] 앞에 등장해 있는 것에 국한 된다.
셋째, 위의 첫째와 둘째를 제외한 무한한 흐름 속에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있다.
넷째, 너무나 광활한 실존의 바다에서 [실패]와 "재미없음"을 멀리 하고, [성공]과
"재미 있음"을 누리려면 과연 무엇을 어찌 해야 할까?
한 마디로 [내] 스스로의 정확한 예측능력 말고는 의지할 것도, 동원할 것도 없다,
무엇을 하면, 또는 안 하면 미래(未知)의 결과가 어찌 될지를 미리 [내] 앞에 의식화
해 놓는 일 뿐 이다.
문제는 사람에겐 누구나 미래에 관한 상상력이 있지만, 그걸 자주적, 능동적, 목적적,
합리적,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데 있다.
오히려 저(自) 스스로도 모르는 상태에서 종속적, 피동적, 무목적, 습성적, 소모적인
상상에 빠져서 끌려가듯 하는 정신상태인 사람이 드물지 않다는데 있다.
가. 스스로 주체답게(自主的으로) 생각(生覺)하여 합리적으로 예측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그저 생각(상상)되어서 알려지는 그대로에 맹신, 맹종되는 -낙관적, 또는 비관적인-
우매한 사람도 있다.
위의 "가"에 해당되는 사람도 [실패]를 완벽하게 피할 수 없는데, "나"에 해당되는
사람이 어찌 그토록 갈구하는 성공을 쉬 얻을 수 있으리오.
과학적, 합리적 예측으로도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거늘,
상상되어지는 그대로를 믿고 따르면서 성공과 재미를 함께 노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