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는 중국어식 단어인 대오(大悟), 각성(覺醒)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고 있다.
대오(大悟),
1.크게 깨달음
2.번뇌에서 벗어나 진리를 크게 깨달음.
각성(覺醒),
1.깨어나 정신을 차리다
2.깨달아 알다.
자, 이 것이 단어의 뜻(두뇌 속 意識)을 풀어 써 놓은 것 인가.
그런 뜻은 추호도 없이 단지 중국어를 우리 말로 반역해 놓은데 불과한가?
그걸 확인하려면 오(悟 : 깨달음)가, 무언지 설명되어 있는가, 그래서 "아하 그게 깨달음(그 뜻)이구나"하고 알 수 있는가?
깨달음이 무언지 모르는데, 크고 작음(大小)을 무엇에다 붙일 수 있다는건지...
"깨달아"를 모르는데, 그걸 어떻게 해서 알아?
따라서 그런 식의 대오니, 각성이니, 대오각성이니 하는 것 모두가 -차라리 하지 않느니만 못 한- 헛소리 아니랄 수 없다.
"책에서 읽은" 선인들의 가르침에도 "깨달음은 말로 가르쳐 줄 수가 없는거야, 스스로 깨달아야 해" 하면서,
자신은 "나도 깨달음이 무언지 모른다" 하면서 깨달아라 하거나, 자신은 깨달은 척 하는 사람도 있었나 보이더라만...
나는 깨달음(智慧)을, 알기를 가운데 놓고 그 알려는 방향이 건너편(彼岸)으로 지향하는 것을 알기(知)라 하고,
그 알려는 방향이 -그 어떤 대상도 없는- 순수한 이편(此岸)으로만 지향하여 자신을 -알 길이 없어서 알지 못 하지만== 순수한 홀로로 있구나(唯我獨尊) 하고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내(사람의 두뇌 속 정신) 자신이, 건너편(彼岸)의 대상(意識)을 아는 것이 앎(知)이고,
그 모든 앎의 주체인 내 자신이 -대상화가 가능한 모든 것을 제외한 나머지로- 순수하게 홀로 있음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覺)이다.
예컨대, 내게 알려지는 자기에 관한 모든 앎(수만 가지라 하자)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과, 그 것을 아는 일조차 제외하고 남는
유일한 것이 진정한 내 자신이구나 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알고 보면 깨달음은 너무나 단순하고 쉽다.
내가 알거나, 알 수 있을 모든 것을 제외하고, 오직 아는 일을 할 수 있는 내 자신은 항상 홀로이구나 하는 것이 깨달음이니까.
그렇지만, 깨달음의 뜻을 제대로 모르거나, 그걸 만들어서 가지거나, 누구에게서 배워서 얻거나 하는 무엇이라고 아는 한,
영원히(?) 깨달음을 만들지(生覺하지) 못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그토록 깨달음을 추구해 왔을까?
속박에서 해탈하고 싶어서다.
그렇지만, 깨달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속박이 없으니 해탈 또한 없다, 본래 청정, 적멸이다"고 한다,
왜 그리 말 할까?
고민, 고뇌, 번뇌니 하는 것 일체는 두뇌 속 피안(彼岸)인 의식개의 일 이고, 그걸 해결 내지는 해소할 내 자신은 항상 차안(此岸)에서 그 것들을 초월해 있으니, 자유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런 자신을 깨닫지(自覺하지) 못 하면, 의식계 속을 실제처럼, 그 속에 있는 자기에 관한 의식을 내 자신이라 착각에 빠지게 된다.
비유하자면,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영화가 실제처럼, 그 속에 자신이 있는 것 처럼 희노애락에 빠지는 일,
꿈을 보는 내가, 꿈을 실제처럼, 꿈 속에 내 자신이 있는 것 처럼 웃고, 울고, 벌벌 떠는 일,
강물에 비친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강물에 빠진 것 처럼 착각하는 순간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진실은 모르고, 번뇌에 빠져 헤매는 자신을 자신이라 착각하고 해탈하려고 발버둥 친다.
그 어떤 "괴로운 나"도 내 자신이 아니다.
그 어떤 "괴로운 나"도 내가 잡아서 내게 붙일 수(執着)도 없고, 그 것이 내를 사로잡아 붙들지도 못 한다.
단지, 내가 스스로 깨닫지 못 하여, 그 것을 내 자신이라고 착각되는 동안만, 마치 내가 그 것에 묶이고, 잡히고, 갇힌듯 여겨질 뿐이다.
필자의 이런 글이 이해되지 않으시면, 스스로 실험해 확인해 보시라.
그 어떤 심각하고 크나 큰 걱정꺼리도, 그대 스스로 "내 건너편 마음속 일이지, 내 자신에 붙은 일이 아니다, 그걸 어찌 처리할지는
내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다, 물론 내게 자유로운 해결책이 없다고 할 자유조차 내 자신의 것 이다" 해 보시라.
어때, 확실히 그렇지 않는가?
진지하게 검토, 확인해 봤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