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고 있는 곳 일체를 실재(實在)라 하자.
태허(太虛)와 그 안의 모든 공(空), 기(氣), 물체를 포함하여 있는(在) 그대로(實)를.
이 실재(實在)를 다음과 같은 세 차원으로 구별할 수 있겠다.
1. 실재(狹義)
다음의 의식, 언어를 제외한 전부를 실재라 하자.
2. 의식(意識)
사람의 두뇌 속에, 위의 1 (實在)에 관한 의식(意識)이 형성되어 있다.
그 하나마다 "이름(名)", "이미지(識)"로 구성되어 있고, 그 중에는 상대적인 "평판(意)"이 부가된 것(意識)도 있다.
1 (實在)이 아니고, 1 (實在)이 의식으로 들어 가거나, 의식이 실재로 나올 수가 없고, 추호도 같은 성질이 없이 이질적이다.
3. 말(言語)과 글(文字)
사람이 서로 - 광의(狂意)의 실재(實在)에 관한- 두뇌 속 정보와 평판(意識)이 포함된 의사(意思)를 소통하고자 만든 특수한 기호 형식이 말과 글 이다.
음성 기호로 된 것이 말(언語)이고, 글자 형식으로 된 것이 글(文字)이다.
말과 글은 한편으로는, 두뇌 속에 의식(意識)의 일부(제6 語識과 제7 意識)로 있기도 하고(이를 語, 字라 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뇌 외부로 표현되기도 한다.(이를 言, 文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표현된 언(言)과 문(文)만을 합쳐서 말 이라 하고자 한다.
이상 세 가지는 이미 설명을 통하여, 있는 곳도 별개이고, 성질도 전혀 달라서, 같다고 여길 것이 실제로는 추호도 없다.
단지 사람에 의해서, 실물과 사진 설명의 관계로 연결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질적, 양적인 차이가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풍부하고 자세하게 말 해도, 말은 소리(글은 글자)일 뿐 이고, 그 이외의 추호의 의식도, 실재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풍부하고 자세하게 의식화 해 놓아도 의식은 두뇌속 의식일 뿐이고, 말이나 글에 실려 나가지 못 하고,
두뇌 외부의 실재가 의식으로 들어 오지도 못 한다.
이상의 설명으로, 사람의 두뇌 바깥인 실재(1), 두뇌 속 의식(2), 두뇌에서 나가는 말(3) 세 가지는 전혀 이질(異質)임이 이해되리라.
그런데,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그 (1), (2), (3)이 "유사(類似)" 같다(同一)"는 정도가 아니라,
혼동(混同)에 빠지기 일쑤다.
예컨대누군가로 부터 "내 주머니 속에 100만원이 있다"는 말(음성)을 들으면,
내(이 사람) 두뇌 속에 "저 사람 주머니 속에 있는 100만원"이라는 의식이 형성되고,
그 것, [저 사람 주머니 속에 있는 100만원]이라는 의식을 실제로 있는 것을 아는 것 처럼 혼동된다.
말이 곧 의식이고, 의식이 곧 사실처럼 혼동된다.
또, 누군가로 부터 "너, 10년 전에 아무개 그 인간에게 이런 피해를 당한게 있지"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간에게 피해를 당하던 기억(意識)"이 떠 오르고,
그걸 알면서 "그 인간에게 피해를 당하는 나"가 지금 내 자신인 것 처럼 착각, 혼동된다.
이런 이야기는 흔히 들으리라.
말로 병을 만들기도 하고, 병을 낫게도 한다는,
희망적인 말은 웃고 춤추게, 절망적인 말은 울고 움츠리게 한다는.
물론, 이와 같은 "동일한 것 처럼 여겨짐"이 필요악(必要惡)이기도 하다.
만약에 그런 동일시가 없다고 보면 직접 접촉할 수 없는 그 무엇도 실제로 어떻게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된다.(必要善?)
그렇지만, 비슷할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는데 비슷하다 "여김"을 선택할까 말까를 필요에 맞춰 스스로 결정하지 못 하고, "여겨 짐"에
무턱대고 끌려가는 식이면 온갖 부작용(오인, 오해, 착오, 오판, 사기당함등)이 초래될 수 있다.(불필요한 惡)
그러니, 이상 세가지 각각 다른 차원임을 망각하지 말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지혜가 긴요하다.
말을 스스로(自) 주도하여 잘 만들고 다듬어서 쓰지 못 하면, 제 멋대로 만드어 져 오는 말에 맹신, 맹종하는 가련한 노예처럼 되는데도...
내가 말로 마음을 만들고, 마음으로 환경을 만들어서 삶을 운전하는 게 자주적인 삶이고,
멋대로 만들어지는 마음대로, 말대로를 내 자신의 말인 것 처럼 착각에 빠지면 진흙탕 속에 바퀴가 빠진 자동차처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