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두뇌 속에서 아는 일을 하는 내가 아는 것은 의식(意識)이다.
"내(주체)가 아는(행위)" 까지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이 시작이고 끝이다.
대상인 의식은 [내가 아는] 것(대상)이니, 아는 그대로이다.
위의 세 가지중,
2 아는(행위)일은 내가 하고 있지만, 아는 행위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알 수는 없다.
비유하자면, 후랫쉬 불빛(아는 지혜)으로 후랫쉬 불빛을 비추어서 볼 수는 없는 것과 같다.
3 알려지는 것(대상인 意識)은, 내가 아는 결과물(?)이니 모를 수가 없다.
그런데 나머지 하나 1 아는 행위를 하는 주체인 내 자신은, 자신을 알 수가 없다.
비유하자면, 후랫쉬 불빛을 뒤로 돌려서 후랫쉬 몸통을 비출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바로 내 자신이 위의 1 (사람의 두뇌 속에서 의식을 아는 일을 하는 정신)이다.
그런데, 비유한 바와 같이 지혜라는 빛으로 의식을 비추어서 아는 [후랫쉬]와 같다면,
몸통이 하나인 후랫쉬가 그 빛의 방향을 제 몸통으로 돌릴 수가 없으니 보고 알 수가 없다.
이상과 같이 내가 아는 것은, 언제나 내 건너편에 등장해 있는 의식일 뿐 이고,
그 것을 아는 내 자신은 언제나 그 어떤 의식과도 -아무리 가까워도- 따로라고 알아야 정상인데,
내 자신을 알 수가 없고 오직 아는 것을 전제로 하여 "아는 것이 있음은, 그걸 아는 내가 있음인 논리적 증명"이나 가능한데 그걸 못 하면 소위 환상적 경험인 착각과 혼동에 빠지게 된다.
[1 내가 2 아는 3 것] 중에서, 1과 2는 내 무지(無知) 속에 있고, 3 만이 아는(知) 대상으로 명백하다.
그 3 (알려지는 의식) 중에 "자기", "자신", "나", "내 자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의식(이를 통칭하여 我意識)이 내게 알려질 때, 내가 자신으로 깨닫지 못 하면 그 것이 마치 내 자신처럼 착각되고, 그 것이 있는 의식적 상황이 마치 내 현실처럼
혼동되는 일이 발생한다.
극장의 관람석에 앉은 사람의 정신(곧 내 자신)이, 스스로 깨닫지(自覺)를 못 하면(不覺) 영화속 마귀에게
쫓기는 주인공을 내(관객)라고 착각하고, 그 영화 속에 내가 있다고 혼동되는 것과 같다.
혼자 누워 잠든 사람의 정신이 자각을 못 하면, 꿈 속에서 하늘을 날으는 나(?)를 자신이라 착각하고, 꿈을 현실처럼
혼동하는 것과 같다.
그리워 하는, 혹은 미워하는, 혹은 불안해 하는, 혹은 걱정하는 아상(두뇌속 意識)이 내 자신처럼 착각되고,
두뇌 속의 그 -의식적인- 일이 실제의 일(현실)인 것 처럼 혼동되면 그게 바로 근심, 걱정, 번뇌, 고뇌에 빠졌다는 일이다.
다 자각하면 생기지도 않고, 생겨 나 있더라도 자각만 하면 사라지는 환상적인 경험일 뿐 이다.
깨달으면 무슨 공덕이 있느냐고?
백해무익한 번뇌망상으로 부터 자유 내지는 해탈이 쉽고, 그 시간 노력 에너지를 선용(善用)하는 보상이 작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