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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觀)이 없이 보임, 들음(觀)이 없이 들림이 있을까, 없을까?

나 아닌 내 2020. 9. 26. 15:55

일반적 상식으로는 봄과 보임, 들음과 들림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 한 쪽이 없으면 상대 쪽도 없고, 그 한 쪽이 있으면 상대 쪽도 있게 마련이라는.

 

그런데 "봄"이니, "들음"이나 하는 행위의 주체가 무엇이냐 하는 진문을 진지하게 검토해 보면

무언가 애매 모호한 점을 만나는 수도 있으리라.

탐구해 내려는 정신력의 정도에 따라서는.....

 

산 위에 혼자 앉아서 눈 감고 있다가 눈을 뜬다.

온갖 모양과 색갈이 보이고, 온 갖 소리가 들린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보임"과 "들림"이 있다. 

 

그런데, 그 "보임"과 "들림"을 대(對)하여 아는 내(自)가,

스스로 주도하여 보기(봄), 듣기(들음)를 하자고 결정하고 실행한 결과로서의 보임이고, 들림인가?

아니면, 내 스스로 주도하기는 커녕, 싫어하는 보임이고 들림일 수도 있는데, 내가 그걸 주도했을라고? 인가....

 

예컨대, 눈을 사용함에 있어서 내 스스로 주도하여 뜨기(감기), 시선방향, 주의 강도 등등을 주도하여 보는(보기를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저 저절로 눈이 감기고 뜨이고, 눈길(시선)이 가는대로 보이는(보기를 안 하고)대로인 경우가 있기도 하다.

보기와 보임, 그 비율은 어느 정도일까?

 

사람들끼리 다투는 일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더러 있다.

"보기(듣기) 싫다",

"보기(듣기) 싫으면 보지 않으면 될 텐데 날 보고 왜!?"

"보이(들리)는 걸 어찌 안 보냐고!?"

 

서로의 위치가 바뀌어도 똑 같은 말을 주고 받으리라.

"(나 보고는) 보기싫으면 안 보면 될 것 아닌가 했쟎아!?"

"(너 또한) 보이는 걸 어찌 안 보냐고 했쟎아!?" 라고.

 

다, 자신이 무엇인지 깨달음(自覺)이 없어서다. 

[ 1. 내(주체)가,  2. 아는(행위), 3. 보기싫은 그 것(객체)] 중에서,

3.  "보기싫은"은 나의 마음(제7我意)이고, 그 것은 두뇌 속 기억이나 상상인 정보(識)이고,

2. 아는(행위)은 내 스스로 부릴 수 있는 자쥬 자재의 기능이고,

1. 내(주체)는 위의 2. 3 그 무엇과도 초월해 있으면서, 그 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데 그걸 몰라서다.

 

내 스스로, 누구의 무엇을 위하여 보기, 듣기등의 일을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덯게 할까를 주도하여 행하는 일을

내 스스로 보기, 듣기라 한다면,

그저 알려지는 그대로, 특히 마음이 심판한 그대로 알려 짐(보임, 들림)에 종속적으로 착각, 혼동에 빠져 있으면

보임을 보아도 보기가 아니고, 들림을 들어도 듣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전혀 보지 않고, 전혀 듣지 않는 보임도, 들림도 있을 수 없다.

왜냐, 보임은 내게 보임이고, 들림 또한 내게 들림이니 내와 따로는 보임도 들림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제 제목의 물음에 답을 낼 차례이다.

 

내가 전혀 보지 않고, 듣지 않는 보임, 들림은 있을 수 없다.(있다면, 그건 남의 보임, 들림일 분)  

내가 전적으로 주도하여 보고(보기를 하고). 듣고(듣기를 하고) 하여서 보임, 들림은 아주, 매우, 너무나 드물다.

내가 종속적으로 보이는, 들리는 그대로를 -보고, 듣고한 것 처럼- 아는 일은 아주, 매우, 너무나 흔하디 흔하다.

 

그 차이는 스스로 검토, 확인, 실험해 보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