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좋아(好意)"와 "나빠(惡意)"는 상대적인 평가어(意, 소위 "마음"이라는 것)의 대표적인 전형(典型)이다.
긍정적인 언어를 대표하는 좋아(好), 부정적인 언어를 대표하는 나빠(惡)이다.
상대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한 쪽이 둘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좋으면서 나쁘다", "나쁘면서 좋다" 할 수가 없다는 뜻 이다.
그렇다면 위의 제목은 어떤 뜻 인가?
단적으로 안목(두뇌 속 에서 대하여 아는 意識)을 넓혀서 보면 그렇다는 뜻 이다.
시간적으로, "그때는 좋았고 지금은 나쁘다" 한다거나,
공간적으로, "이 쪽(자기)에는 좋고 저 쪽(상대)에는 나쁘다" 할 수가 얼마던지 가능하므로.
이런 관점을 자기라는 한 사람을 생명과 육신, 정신, 의식으로 구별해 놓고
어떤 물건이나 일이 그 사람의 "생명과 육신에는 좋은데, 의식에선 나빠(싫어)" 하는 경우(쓴 약)
"의식에선 좋아하는데, 생명과 육신의 삶에는 나빠(배척)" 하는 경우( 아부, 마약)는 드물지 않다.
그런데 위와 같은 안목 조절(광범한 통찰, 부분적 정밀관찰)을 하려면,
그 일을 감당할 자 스스로의 깨달음(自覺)이 있어야 하고,
그 일을 할 수단(정신 자신의 말)과 방법(두뇌에다 질문, 명령하기)을 알아야 할 수가 있다.
위의 제목을 "그렇구나...(首肯)" 할 줄 안다면 인생사에 백해무익한 번뇌로 부터(?)의 해탈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쉽게 된다.
"만나면 좋겠다는 마음이지만, 만날 수 없으니 -차라리 없느니만 못 하여- 나쁘다",
"통쾌하게 복수하면 좋겠다는 마음이지만, 그럴 가망이 없으니 -차라리 없느니만 못 하여- 나쁘다" 하기가 어려운가?
좋아서(마음에서) 좋아야(인생에) 올바르고,
나빠서(마음에서) 좋아야(인생에) 올바르다.
왜 좋아(好意), 나빠(惡意)를 인생에 비추어서 검토, 확인하지 못 하나, 안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