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방탄소년단]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는 정국...ㅋㅋ, 이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더라.
방탄 소년단의 일원인 정국이,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른다는 내용으로.
영문법 처음에 등장하는 3인칭은 나, 너, 그 라는 이름(代명사)이다.
그 중에 '나'는 유독 대문자 I를 쓴다.
나를 최고로 중시하기 때문인지, 나는 하나 뿐이라선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자칭이건, 타칭이건 칭 하는 자(稱者)는 언제나 같은 하나이지만, 피칭자는 수다(數多)하기 이를 데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보고싶은 나, 보기싫은 나, 키가 큰 나, 몸이 건강한 나, 착한 나, 등등등......
시간적, 공간적, 의미적으로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그 많고도 많은 온갖 '나'들을 스스로(自) 아는 [내](칭자 자신)는 언제나 유일무이 하다.
유일하고 둘이 아니기 때문에 아는 자와 알려지는 둘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내]가, [내]를 "동시에 주체로서 객체로 알기"가 불가능 하다.
따라서 [내]가(아는 주체로서) 내 자신을 (객체로 삼아서) 안다고 여기는 것은 언제나 착각이 아닐 수 없다.
그 착각이 바로 피칭자인 '나'(소문자 i)를 1인칭으로 여겨서 칭자인 [내] (대문자 I)라고 아는 착각이다.
예컨대 "첫사랑을 그리워 하는 나(i)"를, 알고 있는 [내](I) 자신이라고 혹은 애착하고, 혹은 혐오에 빠진다.
[오쇼 라즈니시]가 주장한 중도(中道)의 개념적 두 요소인 포용과 초월에 따라서 [내]가 '나'들을 보기로 해 보자.
첫째, [내]가 아는 모든 '나'를 이 두뇌 속 의식적 주인공중의 1인칭 상대로 -좋다, 싫다등 없이- 그대로 인정한다(包容)
둘째, 그 중의 어떤 '나'도 [내]가 자유롭게, 전적인 책임으로 다룰 대상일 뿐, 내 자유와 책임의 예외는 없다.(超越)
우매한 정신상태의 사람은, 어차피 자기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어서 인정하건 부인하건, 좋아하건 싫어하건,
하나의 의식적 주인공인 '나'인데도 -잊으려, 버리려 하는등- 차별적으로 대하려 하니 그게 가능하겠는가?
마찬가지로, 그 '나'들을 다룰 내 자유와 자책을 다 하려면, [내] 자신이 그 것들 중 어느것도 초월해 있다는 자각이 없이
가능하겠는가? (내 아닌 것 이라야 내가 다룰 수 있지, 내가 내를 어찌 다루겠는가)
복잡하고, 어렵고, 힘든 문제일 수록, 그 문제를 차별적으로 보지 않도록(포용하도록) 극히 주의해야 하고,
그 문제와 관련된 어디의 무엇과도 [내]가 초월해 있음을 자각해야 문제 해소에 자유와 자책을 다 할 수가 있다.
그 어디에도 [내 + 문제]라는 -착각이 있을 뿐- 그 어떤 집착도 실제로는 없다.
따라서 [내 문제 - 문제 = 내]도 있을 수 없다. (이미 문제와 초월해 있다는 자각이 가능할 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