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아는 것만 안다.
모른다고 아는 것만 모른다고 안다.
모른다고 알면 그 모르는 것을
1. 알려고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 몰라도 그만으로 넘기려는 사람도 있다.
위의 1(알려는 시도)에 해당되는 사람 중에,
가. 실험적, 과학적, 합리적으로 알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두뇌 속에서 형성되는 상상을 그대로 믿는 사람도 있다.
위 "나"(자기 두뇌 속 상상을 믿음)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상상이
가. 그 자신(정신)이, 스스로 합리적인 인과율에 따라서 만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 기존의 경험과 학습의 축적에서 기계적, 조건반사적으로 저절로 형성되는 사람도 있다.
위 "나"(기계적 믿음)의 상상을 결정짓는 요인은 무엇일까?
누구의 두뇌나 믿고싶은 것만 상상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건간에.
그 "믿고싶은 이유"가 무엇인지,
1). 그 (내) 자신이 아는 경우도 있겠지만,
2).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그렇게 믿는데?" 하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구별할 수가 있다.
-(이유도 밝히지 못 하고) "틀림 없다니까, 확실하다니까" 믿는다는 대답은 믿는 이유를 모를 때 이고,
- "전후관계를 따져 봤을 때", "일반적 보편적인 경험칙에 비추어 봤을 때", "인과관계를 추리해 보았을 때",
"목적적, 효율적으로 도움과 해로움을 판단해 봤을 때" 등등 이유를 밝힌다면 그런 이유라고 알기 때문이다.
위의 이유 중에서 "목적적, 효율적으로 도움과 해로움을 판단해 봤을 때"라 함은,
그렇다고 믿는 것이 목적(자기의 삶에 안전, 건강, 순탄, 조화를 도모함) 실현에 도움되면 믿기로,
반대로 도움이 안 되거나 해로움이 된다면 믿지 않기로 한다는 이유를 믿음 여하에 관한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 이다.
많은 사람들의 -특히 정치적 장래에 관한 정치인, 정당의 주장에 대한- 믿음은 거의 무목적, 맹목적 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정도가 확신에 이르러, 믿음이 아닌 사실 자체를 아는 것 처럼의 심리 상태가 된다.
믿음이야 안 믿음으로, 고쳐 믿음으로, 바꿔 믿음으로 바꿀 수 있지만, 그렇다고 알면서 그렇지 않다고 알 수는 없으니
소위 "고집 불통"이 된다. (지역감정이 바로 그러 하다)
사람(그 정신)이 아는 것이, "그 순간에 자기 두뇌에 떠 올라 있는 의식"에서 더도, 덜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 나머지는 모르는 줄도 모르면서, 모르는 것이 전혀 없는 것 처럼 아는 사람 또한 얼마나 될까?
바로 그 무지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것이 희미한 믿음의 차원이다.
믿는 상상이 있으므로 모르는 것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고,
희미한 상상에의 믿음에 빠져 있으므로 제대로 알지 못 한다.
그 결과 믿어서 도움이 될(소위 긍정적, 희망적, 낙관적인) 상상은 만들어서 믿지 못 하고,
삶에 불화, 장애, 난관, 해로움이 될(소위 부정적, 절망적, 비관적인) 상상은 없애지 못 하고 믿는 사람들이
결코 드물지 않다는 것을 보아 왔다.
자기의 삶을 위하여 [믿음](제8 自意)을 유익한 도구로 써야 할 정신(내 자신)이,
"믿음"(제7 心意)에 맹신, 맹종하는 노예처럼 자기의 인생을 그 "믿음"에의 도구나 수단처럼 희생하길
서슴치 않는 역적질을 해 대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