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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님, 미운 놈이 어디에 있는고?

나 아닌 내 2022. 11. 6. 16:33

고운 님이 그리워서 보고 싶다고 한다.

그립다고 아는 것으로 봐서 보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보고 있으면서 어찌(무슨 이유로) 보고싶다고 하는고?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싶으면 지금 당장 더 보면 그만인데....

 

미운 놈이 역겨워서 보기 싫다고 한다.

보기 싫다 하는 것으로 봐서 보고 있는 것이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보고 있으면서 어찌(무슨 이유로) 보기 싫다고 하는고? 

보고 있으면서 보기 싫으면, 지금 당장 안 보면 그만인데....

 

이런 대화를 하다 보면 고운 님, 미운 놈을 보고 있는 건지,

못 보고 있는 건지 헷갈리게 되리라.

안(못) 보(對하)면서 안다고 할 수 없고, 알 면서 안(못) 본다고 할 수도 없어서.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너무나 단순해서 알기 쉬워야 할 일을,

단지, 그 일에 무식(無識)이라서 몰라서일 뿐 이다.

사람(그 정신)이 안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에 관한 문답이,

그 사람의 두뇌 속에 없어서다.

 

사람이 "아는 것"과 "안다(고 믿어지는)는 것"의 소재가 전혀 다르다.

전자(안다는 것)는 그의 두뇌 속 의식이고, 후자(안다고 믿어지는 것)는 

그의 두뇌 바깥에 있었거나, 있거나, 있을 것 이라고 믿어 진다.

 

사람이 안다는 것 일체가 전자이면서 후자라고 알고(여겨지고) 있다.

두뇌 속 의식을 알면서, 두뇌 바깥에 있는 것을 아는 줄 믿음에 빠져 있다.

 

"30년전 고향에서 만나던 고운 님"을 안다는 사람은,

"20년전 행사장에서 만난 미운 놈"을 안다는 사람은,

과연 어디에 있는 사람을 안다고 알까?

 

"30년전 고향"과 "20년전 행사장"이 지금 어디에 있어서 아는 것

이라고 하는고? 

그 몸의 두뇌 속(의식계) 말고 어디에 있을 수 있는고?

 

그 "30년전 고향에서의 고운 님"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이 없다.

"20년전 행사장에서의 미운 놈"도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앨범 속 사진과 같은, 두뇌 속 의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고싶다고 해도, 눈 앞(두뇌 바깥)에 등장할 수가 없고, 

보기 싫다고 해도, 눈 앞(두뇌 바깥)으로 나와서 사라질 수가 없다.

 

그러니 아무리 보고싶다고 해도 헛수고, 헛일일 뿐 이고,

아무리 보기싫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2-30년이 지난 오늘에 그(기억 속의) 사람의 본체를 만나게 되면

지금도 보고싶은, 보기싫은 마음이 솟아 오를까?

"어라? 너무나 아닌데? 괜히 보고 싶어(싫어) 했구먼...." 하지는 않을꼬?

 

어쨌거나 그러다 어느 한 쪽이 인생을 마감하게 되면 회한에 빠지지......

소중한 인생의 시간, 정력, 노력, 자산을 낭비하면서 헛고생 많았다고....

 

그리고 끝으로,

고운 님, 미운 놈이 자기 두뇌 속에 하나의 의식일 뿐 이라고 알았더라도

"비우고 싶다"거나, "잊고 싶다"는 또 하나의 바램이 있는 사람에게 권한다.

 

두뇌 속 의식중 정보(기억이나 상상인) 부분인 식(識)은 지울 수도, 

고칠 수도, 바꿀 수도, 버릴 수도 없지만,

그에 연결되어 있는 "고운 님", "미운 놈" 이라는 마음(意) 부분은

내 스스로 하고자 한다면 새로 고침, 바꿈, 연결 끊어 버리기,

무시 내지는 경시하기등을 얼마던지 자유롭게 할 수가 있다.

 

단적으로 사람들은,

버리거나 잊을 수는 없는 기억이나 상상(識부분)은 버리거나 잊으려고 애만 쓰고,

고치거나 바꾸고 버리고 무시하기가 너무나 쉬운 마음(意부분)은

그리 할 엄두조차 내지 못 하는 우매함에 빠져 헤맨다.

 

쉽게 할 수 있고 효율이 높은 일은 몰라서 못 하고,

할 수 없고 역효율만 높은 일은 잘못 알아서 할려고 애만 쓰니...

오호라 이 얼마나 가련한 일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