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가 [가시 나무]의 노랫말중 일부이다.
제목을 보면 "내"라는 이름이 세 곳(괄호 안까지 포함하면 네 곳)에 등장한다.
그들 셋(또는 넷)이 같은(同) 하나(一)인지, 이름만 같을(同) 뿐 다른(異) 것 인지는 언급이 없다.
특히 위 제목의 괄호 속에 있는 "내가 보니(알기로)" 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무시되고 있다.
그 것(대상을 아는 주체)이 없으면, 나머지 셋(알려지는 대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없는데도 말 이다.
바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빠져 있는 스스로를 모르는 불각(不覺) 때문이다.
스스로(自) 깨닫지 못함(不覺)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알려지는 대상 중의 어느 것(我意識)을
저(自) 자신이라고 착각에, 동일시(同一示)에 빠져 있음을 전혀 몰라서 엄청난 어둠속 미로를 헤맨다.
그 결과 누군가가 "그대(사람)의 두뇌 속에, 그대에 관한 의식이 너무나 많다, 그 중의 이런 것은
백해무익하니 버려라" 하고 선의(善意)로 조언이라도 하면,
"당신(사람)이나 잘 해라, 무슨 권리로 내 기분과 감정을 상하게 하느냐?"고 길길이 화를 낸다.
이 사람의 [내]가, 그 사람의 [내]를 상대로 말을 하지만 그렇게 알고 하는 사람(그 정신)은 거의 없다.
사실상 이 사람 두뇌속 수다한 "내"중의 어느 하나가 "내"라고 말 하면, 그 사람 두뇌 속의 수다한
"내'중의 어느 하나가 듣고 "내"라고 반응하는데 그친다.
이 사람의 [내]도, 그 사람의 [내]도 위와 같은 "로봇과 로봇의 대화"를 이 [사람]과 그 [사람]의
대화라고 안다.
그 두뇌 속 수다한 무리(衆生)중의 하나, 하나가 제 나름의 말을 하고, 남의 말을 듣고 반응한다.
사람을 작은 우주(小宇宙)라고 하는 이유가 그래서다.
위 제목에 등장해 있는 "내"는 같은 하나(同一)일 수 없는 각각 다른 넷 이다.
1. 모든 '내'를 담고 있는 자기라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이하 [자기]라 함)
2. 위 [자기]의 두뇌 속 의식계에 형성되어 있는 무수한 "나(我) 의식"을 지칭한다.(이하 '나')
3. 위 1과 2를 아는 정신이 스스로를 자칭(自稱 =결코 指稱이 아님)하기도 한다.(이하 [내])
4. 위 3이, 의식계 맞은 편에 유일무이한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깨닫지(自覺) 못 하고,
의식계에서 쉴 자리를 찾는 환상적 주체로서의 자칭이다.(이하 꿈 속의 '내')
이제 이렇게 구별할 수만 있다면 올바르게 정리하기는 너무나 쉽다.
첫째, 의식게에 쉴 곳을 찾는 '내' (위의 4)는, 꿈 속의 주인공 같다고 보고 무시한다.
둘째, 위의 1과 2를 아는 [내]는, 1(자기)에 속하는 일부이지만 2(무수한 '나'들)를 알고
다룰 수 있는 주체이지, 2의 자리에로 가지고 못 하고, 2 에서 [내]게로 오지도 못 한다고
알아야 완전한 자유, 전적인 자책을 깨닫게 될 수 있다.
셋째, 1(자기라는 사람)을 위해서 충성하고, 2들을 자유자재로 다스릴 자유와
책임을 성실히 이행할 수가 있다.
자기(사람) 안에, 자기에 관한 의식("나")들이 아무리 많아도, [내](정신) 자신이
그 것들을 올바르게 다룰 자유와 책임만 확고하게 깨닫고 있으면 무슨 문제가
쌓여서 남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