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더러하는 말,
그 사람이 "나를 존중"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존중받고" 있다.
그러니 "존중받는 나" 이다.
그 사람이 "나를 무시"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있다.
그러니 "무시당하는 나" 이다.
"존중받는 나"이니 기쁘다, "존중해 주는 사람이" 고맙다,
그래서 "나도 그를 존중"한다, 그 또한 "더 나를 존중"한다.
유유상종 선(善) 순환이다.
"무시당하는 나"라서 "나쁘고 싫어서 슬프고 성 난다".
"나를 무시하는 그 인간이" 원망스럽고 밉다.
그래서 "나도 그를 혐오, 적대"한다, 그 또한 "더 나를 무시" 한다.
역시 유유상종 악(惡) 순환이다.
이상은 인간사 일반적인 현상이다.
당연한듯, 자연스럽기 까지 하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을 가져 본다.
도대체 "(무언가를)존중하는 나", "(무언가에게서) 존중받는 나"라는
말(형식)에 해당되는 사실(실질)이 어디에, 어떻게 있길래,
거의 모두가 그 뜻을 잘 알고 있는듯 태연할까?
혹시 "존중하는 나?, 존중 안하는 나와 반대라는 말 아닌가?"
"존중받는 나?, 존중 못 받는 나와 반대라는 말 이고..."
"무시하는 나? 무시 안 하는 나와 반대라는 말 이지 뭐..."
"무시당하는 나? 무시 안 당하는 나와 반대라는 말 이고..."
설마 이런 식으로 아는 걸 안다고 아는 것은 아니겠지?
사람은 온갖 일을 한다, 오직 하는 일 뿐 이지 해서 남 에게 주는
일도, 받는 일도 없다.
오직 두뇌 속 그 어떤 일 정보(識)에 "준다" / "받는다"는
상대적 언어(意), 즉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예컨대, 손에 사과를 쥐고 내 밀어 놓고서 타인의 손에 얹어
놓는 일(識)에 "준다"는 - "받는다"와 상대적인- 언어(意)가 연결되어
있을 때 그 사람에게 손 으로 사과를 올려놓아 "주는" 일이라
하는 것 이상도, 이외도 아니다.
또, 운동장에 축구공을 놓고 30M 전방에 차서 보내는 일(識)에
"누구에게 패스해 주는" 이라는 등의 말이 연결되지 않으면,
그냥 공을 멀리 차는 일이라 할 뿐 이다.
존중하느냐 또는 존중하지 않느냐,
무시하느냐 또는 무시하지 않느냐는 두뇌 속에서 형성되는 상대적
언어(意), 즉 마음일 뿐 이고 두뇌 밖 사실에는 그런게 추호도 없다.
때문에 그와 상대적인
존중받느냐 못 받느냐, 무시당하느냐 안 당하느냐 또한 마찬가지다.
눈이 아니라 그 어떤 초정밀 기구로도 "존중", "무시"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추호도 발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끼리 "나는 너를 존중해 주었는데, 너는 나를 존중하긴
커녕 무시하였다" 하고,
그러면 상대가 "오히려 너야 말로 나를 무시하고 있다" 하면서 다투면서
그 해결을 할 수가 없는 경우가 허다한 것은 왜 일까?
첫째, "존중하는 / 받는 나", "무시하는 너 / 무시당하는 나"의 정체(두뇌 속
의식)를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 두뇌 속 의식이 두뇌 밖으로 투사(投射)와 투영(投影)되는 현상을
모르고, 그 것을 사실이 그러한줄 오인, 오해, 오판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제 두뇌 속 "상대방 의식"중의 마음(意) 부분에 "존중하고 있다"고 되어
있으면 "나를 존중해 주는 그 사람(他意識)", "그 사람의 존중을 받는 나
我意識)"가 형성되어 눈 앞의 그 사람에게도 투사, 투영되어 그런 사람인
것 처럼 여겨진다.
제 두뇌 속 "상대방 의식"중의 마음(意) 부분에 "무시하고 있다"고 되어
있으면 "나를 무시하는 그 인간(他意識)", "그 인간에게 무시당하는 나
(我意識)"가 형성되어 눈 앞의 그 사람에게 투사, 투영되어 그런 사람인
것 처럼 여겨진다.
확실한 것은, 그 사람(상대)이 이 사람(자기)을 존중하거나 무시해서
"그 사람으로 부터 존중받는 나", "그 인간으로 부터 무시당하는 나"라는
그런 마음이 생기고, 그렇게 보이는(여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이다.
존중이니, 무시니 하는 것은 그런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제 두뇌 속에서
생주이멸하는 것일 뿐 임을 아느냐 모르느냐, 너무나 쉬우면서 어려운 일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