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필요하고 유익한 것은 만들어서라도 취하고,
불필요하고 유해한 것은 수십, 수백년 된 것도 멀리하거나 혁파해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취해야 할 것, 없애야 할 것이 그리 많지 않다.
필요(必要 =꼭, 반드시에 해당되는 소요)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필요]라는 단어를 올바르게 활용한다면 불필요한, 유해한 사이비 "필요"에
빠지지 않을 수 있지만,
진정한 [필요]를 모르면 사이비 "필요"가 진정한 [필요]처럼 여겨지는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위의 제목은 불교 금강경의 핵심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올바르게 해석하여 활용하면 삶에 중차대한 도움이 된다.
반면에 제대로 응용하지 못 하면 그 만큼의 도움을 얻지 못 하고 오해,
요용(誤用)에 빠지게 되면 유해할 수가 있다.
제목의 문장을 해석하기 전에 먼저 [내(自)], '나(我)',
[내]가 아는 "것(意識=넓은 뜻의 마음)", [실상]이란 단어의 뜻 부터
정리해 두고자 한다.
[내(自)] : 사람의 두뇌 속에서 두뇌의 일부 기관(감각중추, 운동중추,
사고중추)을 부릴 수 있는 신(소위 "精神")이 스스로를 자칭하는
이름이다.
'나(我)' : 사람의 두뇌 속 의식계에 형성되어 있는 의식중에서 그 사람
본인에 관한 의식에 부여된 이름이다.
때로는 그 중의 정보(識) 부분만을 아상(我相), 마음(意) 부분만을 아의
(我意=나의 마음)라 하기도 한다.
그 어느 것 이나 [내]게는 알려지는 대상이지, 그걸 아는 [내] 자신일
수도, [내] 자신의 것 일수도 없다.
이상 [내]와 '나'의 구별을 정확히 하면 제목의 글을 이해하기 쉽고,
그 구별을 못 하거나 엉터리 해석에 빠지면 제목의 글을 올바르게 이해하긴
커녕 오해를 피하기 어렵게 된다.
바로 불각(不覺=깨닫지 못함), 착각(錯覺='나'를 저(自)라고 앎), 혼동
(의식을 실제 사실이라고 앎)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것" ; 바로 일체 유심(一切唯心 또는 일체唯識) 이라는
두뇌 속 의식(意識)이다.
"오직" 의식뿐으로, 그 이외의 것은 추호도 아는 "것"이 될 수 없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는 정반대이다.
두뇌 바깥의 "사물이나 일을 안다고 알고, 두뇌 속의 의식을 아는 줄을 모른다".
눈 앞에 그 어떤 사람이 있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눈을 거쳐서 그 사람에
대한 시각정보(識)가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어서 아는 것 이다.
장님이나 눈 감은 사람이 그를 모르는 것은, 그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
앞에 있는 그 사람에 관한 시각정보(識)가 알려질 수 있는 "것"으로 두뇌
속에 없기 때문이다.
"것(두뇌속 意識)"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면 다음과 같은 오인, 오해, 오판에
빠지게 된다.
1). 그 어떤 "것"도 두뇌 외부의 [실상]이 아니고, [실상] 그대로를 반영
하지도 않는다는.
2). 그 "것"의 정보(識)는 [실상]에 비하면 너무나 한정적이라는,
3), 그 "것"의 마음(意)은 [실상]과는 전혀 무관한 두뇌속의 상대화 산물일
뿐이라는,
우리가 그 어떤 실존하는 [사람]을 잘 안다고 확신하는 경우라도,
그 [사람]과 실제로 접촉하여 형성된 정보(識)가 과연 어느 정도일까,
0.000001%나?
그 [사람]을 "크다", "좋다", 옳다", "착하다", "(가까이 하면) 이롭다" 하는
말(意, 마음)은 무엇이 그 근거일까?
1). 실제로 그 사람이 그렇게 있어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 일까?(그 사람
때문, 탓?)
2). 자기 두뇌속 상대화 작업의 산물이 그래서일까?(자기 마음 탓?)
3). 위의 2)를 자유로 다룰 수 있는 [내]가 2)를 모르고 1)인줄 오인, 오해,
오판에 빠져 있기 때문일까?
만약에 위의 1)이 맞다면 그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 한, 그 사람에 관한 이
마음은 달라지지 못 한다.
또, 위의 2)가 맞다면, 그 마음이 달라지지 않는 한 [내]는 속수무책이다.
3)이 맞다면, [내] 스스로 두뇌속 상대화 작업을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으므로, 그 어떤 마음도 새로 만들기, 고치기, 바꾸기, 무효선언등을 쉽게
수월하게 할 수가 있다.
다만, [내]로서의 자각과 두뇌 부리기 방법(내 스스로의 말로 질문하고
명령하기)의 숙지가 필수적이다.
[실상(實相)] :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 그대로라는 뜻 이다.
두뇌속 "의식"과 구별하기 위해서 쓰는 단어이다.
의식을 아는 "것" 이지, [실상]을 아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응(應) : 어떤 정보(識)가 새로 형성되거나 관련정보(識)가 떠 오르면 두뇌
속에서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화 작업이 이루어 지는 수가 있다.
의식계에서 기계적, 자동적, 반사적으로 이루어 지는 수가 대부분이고,
[내] 스스로 주도하여 작업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하는 사람은 극히
희소하다.
부응(副應) : 따라서 좇아 가는 식으로 응(應).
수응(酬應) : 그대로 응.
적응(適應) : 필요에 적절하게 응.
대응(對應) : 이해를 따로하는 상대로서 응.
반응(反應) : 적대적으로 응.(통상적인 뜻은 "습관적 반응"임)
응무(應無) : 위에 열거한 그 어떤 응(應), 즉 상대화 작업과 그 산물(意
=마음)이 없다는 뜻.
산은 그 산, 물은 그 물 이라고 식(識)되어 있을 뿐, 딴 정보(識)와 상대화
되지 않아서 그 어떤 마음(意)도 연결되어 있지 않음을 뜻 한다.
응무소(應無所) ; 위의 그 어떤 응(應=意, 意識)도 없는(無) 곳(所)이란
뜻 으로, 온갖 응(應)이 있는(有) 곳(應有所)인 의식계(좌뇌?)가 아닌,
순수한 정신만이 있는 곳(우뇌?)를 뜻 한다.
주(住) : 있다는 뜻.
왜 응무소주([내] 스스로 응무소에 있음)를 강조하느냐 하면,
그걸 모르면 의식계(응유소)에 [내]가 있는 것 처럼 착각과 혼동에 빠지는
일이 거의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앨범(좌뇌) 속 군 복부시절 사진의 '나'를 보고 있는 [내]가
스스로를 깨닫지 못 하면(不覺), 그 '나'를 [내]라고 착각에, 지금
[내]가 그 때의 상황에 있는 것(현실?)처럼 혼동에 빠지는 일이 얼마나
허다한가?
이생기심(而를 以로 바꾸어서 以生其心이라 하련다) : 응무소주를 바탕
(以)으로 그 상황(其)에 적절한 마음(心)을 만든다(生)는 뜻 이다.
응무소주는 이생기심을 제대로 하기 위한 전제이고, 바탕인 작업이고,
이생기심은 응무소주의 결실이고 소득이다.
살아 가는 길에는 온갖 의사결정(生心이건, 邪念이건)이 있게 된다.
그걸 올바르게 하면 삶에 필요하고 유익한 마음을 획득할 수 있지만,
그걸 올바르게 하지 못 하면 필요, 유익한 마음을 가지지 못 하고,
엉터리로 잘못하면 불필요, 유해한 마음을 예방, 회피, 배척, 무효화
하기 어렵게 된다.
사람이 겪고 있는 미래에의 불안과 공포, 과거에의 미련과 번뇌,
그로 인한 고통의 거의 전부가 응무소주를 모르고 응유소주에 빠진
것 처럼의 착각과 혼동 때문임을 깨우치는데 매우 귀중한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