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람의 두뇌 속 의식(意識)의 표현인 말(언어)의 뜻에 두 가지가 있다.
1), 정보인 식(識)의 뜻 으로, 식(識)을 표현하는 말을 술어(述語)라 한다.
예 : 갑(이름)은, "얼굴이 붉고 둥근 모습"......
2), 마음(상대적 언어)인 의(意)의 뜻 으로, 의(意)를 표현하는 말을
의미어, 의어(意語)라 한다.
예 : 갑(이름)은, "잘 생기고 인상 좋은".......
"정신차려"라는 말의 뜻을 안다 하려면
그런 말을 듣고 아는 자 스스로(즉 [내]가) 무엇인가 부터 시작하여,
"정신(을) 차려라" 하는지, "정신(아) 차리기를 하라"는 뜻인지를
확인한 다음에,
"차리기"란 말의 뜻이 무엇을 어떻게 차림이란 것인지 밝혀야 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위와 같은 과정을 전혀 이행하지 않고 "정신차려!"
라는 소리인지 말인지를 태연스레 내고 예사처럼 듣는다.
그런 말의 뜻이 뭐냐고 묻기라도 하면 "정신차려라 했쟎아", "정신차려라고
듣고 안다고...." 하는데 그치지 않을까?
사람의 무엇이, 사람의 무엇에게 그리 말 할까?
"그 사람의 두뇌 속 정신이, 이 사람의 두뇌 속 정신인 [내]게 하는 말" 이라는
식으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과연 있기나 할까?
사람의 무엇이, 사람의 무엇에게 그런 말을 하는 목적이 무얼까?
"그 사람과 이 사람의 삶에 안전, 건강, 순탄, 조화를 도모하고자 하는 말"
이라는 식으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과연 있기나 할까?
사람의 마음(정보와 마음을 합친 意識을 뜻함)을 다루어서, 그 마음으로
몸을 작동하여 실행, 실현하려는 일을 담당하는 인생운전 기관을
정신이라 하고, 그 것이 스스로 자칭하는 이름을 [내]라고 하자.
자, 그런 뜻으로 본다면
"내게, 내 스스로를 차리어라" 하는 뜻으로 하는 말 이라면 불능을
의도하는 것 으로 헛소리가 아닐 수 없다.
오직 하나인 [내]가 주체로서 동시에 객체를 차릴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정신 차려라는 말은 "(정신아, 그 무언가를)차리어라(줄여서 차려라)"
라는 뜻으로 보아야 가능하고 필요, 유익할 수 있다.
단지, "무엇이 차리기 할 대상이냐?" 하는 문답이 선행되어야 할 뿐 이다.
정신이 차리기 할 수 있는 것은 두뇌(좌) 속에 의식(意識) 뿐 이다.
밥상에 음식을 차리듯, 두뇌속 의식상(?)에 의식(意識)을 차릴 수 있다.
없던 것을 새로 만들기, 있던 것을 고치기, 바꾸기, 버리기 등등이 의식차리기
이다.
의식차리기의 수단은 말이고, 그 방법은 두뇌에 전하는 질문과 명령형식인
[내 말] 이다.
[내]가 듣고 아는 언(發言)어(聽語)가 아니다.
눈을 돌려서, 귀를 기우려서, 코로, 혀로, 몸으로 정보를 획득하자는 명령,
이전에는, 이후에는 무슨 일이? 자기에겐, 타인에겐 어떤 영향이? 하는 질문
등으로 통찰과 집중, 종합과 분석, 능률과 효과등을 차리기 할 수 있다.
왜 올바른 의식차리기가 필요하고 유익한가?
밥상에 건강유지에 필요 적정한 음식이 -과(過), 부족없이- 있을 필요하듯,
마음상에 인생에 필요 유익한 마음(意識)이 적정하게 있을 필요가 있다.
그 필요가 채워지면 유익하고 그 필요에 과, 부족이 있으면 무익 유해하다.
그렇다면 왜 남의 정신에게 "의식을 (올 바르게) 차려라" 할까?
제대로 올바르게 차리지 않아서 필요 유익한 앎을 가지고 실행,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다.
예컨대, 소위 누구의 인생에 도움도 해로움도 없는 일(소위 "사소한 일)을
놓고 마치 원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사람에게 그로 인해서 자기 인생에
어떤 일이 유발되고 있는지 알려면,
직접 살피건, 예상하여 보건, 객관적으로 비교 평가해 보건, 역지사지해
보건 등등으로 두뇌 속에 의식화 작업을 해야만 한다.
그런 과정과 절차를 거치지 않고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차리지 않아서"
알지 못 하기 때문에 그걸 알려주려고 권하는 것 이다.
누구나 하려고만 하면 의식차리기를 쉽게 할 수 있지만, 스스로 하려고 하지
않으면 차려진 그대로를 알 수 있을 뿐, 스스로 차려서 알지 못 하게 된다.
의식차리기를 잘 하는 사람과 차려진 의식을 그대로 맹신, 맹종하는 사람의
차이는 가히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 같다고 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