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구나(救我)]교(敎).

나 아닌 내 2024. 10. 31. 16:08

살다 보면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그렇겠구나..." 하는 소리를
내는 사람을 간혹 만나게 된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自) 그런 말을 해 본 적은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위와 같은 소리는 그 이전까지 모르고 있었거나, 지금과는 다르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 "내가 모르고(또는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의 표현이다.

따라서 평상시에 통찰력이 풍부하고, 신중하고 진지한 사고습성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에게선 일어나기 어려운 일인 반면에,

사고습성이 편협하고 경솔하고 즉흥적인 사람에게선 나중에 소위
"후회", "반성", "참회"니 하는 일 꺼리가 많게 마련이다.

자, 그렇다면 전자(이하 "현명한 정신"이라 하자)에 해당되는 사람은
나중에 "......구나" 할 일이 극히 적을 것 이고,

후자(이하 "우매한 정신"이라 하자)에 해당되는 사람은 이전이니,
나중이니 하는 구별조차 못 하니(구별하려면 통찰력이 필요하다)
후회도, 반성도, 참회도 못 하게 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정신수준이나 상태의 사람이 나중에 [....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을까?

바로 스스로 노력해서건, 타인의 가르침 덕분이건 우매한 정신 수준에서
어느 정도 현명한 수준으로 상승한 정신의 소유자만이 [...구나]할 수가
있다.

소위 실현 불가능한 "그리움(미련)"이니 "원망(미움)"이니 하는 '나'의 마음
(我意)에 빠져있는 정신이, 그 때 까지는 그 "나의 마음"이 백해무익 하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마치 너무나 소중하여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처럼
여겨지고(오해, 오판으로 알고) 있었다가 나중에, 스스로의 깨달음이나,
타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나서 "그런(제대로 모르고, 엉터리로 알고) 줄을
몰랐구나(이제는 제대로 알았다)" 하는 깨달음이 그런 예 이다.

세상사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 분리가 추호도 없이 하나(전체)로 흐른다.
그 하나(전체)로 흐름이, 그 하나(전체) 속에 있는 개인의 두뇌에선 시, 공간적
으로 분리된 것 처럼 반영되어 있다.

비유하자면, 거대한 강물을 앞에 두고 보고 있는 사람의 두뇌 속에 공(空) [필름]
이 있고, 그 것이 눈 동자 크기의 단위로 촬영되어 저장되고 있다.

그 한 장면에 담는 장면의 폭을 넓히면 공간적 통찰, 좁히면 편협이라 할 수 있다.
예, 나의 처지와 의사만 알고 상대나 타인의 사정은 모른다(공간적 편협)

또 거의 동시에 다른 시간대 촬영분도 상영하면 시간적 통찰, 하나만 상영하면 편협
이라 할 수 있겠다.
예, 지금만 알수 있고, 나중의 변화(결과)는 모른다(시간적 편협)

편협하게 아는 그 것(그 순간의 두뇌 속 의식) 조차도 얼마나 진실하고, 올바른
가치가 있는지 알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보다 더 넓은 공간, 더 긴 시간에
어떤 일이 있었고, 있고, 있을 것 이며, 그 것이 자기와 주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가치)을 끼치게 될지 알겠는가...

이런 일을 차려서 아는 길이 바로 [.....구나] 하기 준비를 습성으로 길러 두는
일 이다.

사전에 스스로의 선천적 지헤를 계발하여 현명한 정신으로 상승하면 더 없이 다행
이지만, 비록 나중이라도 더 늦기 전에 시, 공간적 통찰과 올바른 가치판단을 하려
는 노력을 하여 편협한 오인, 오해,오판에 갇혀 있는 '나를 구함", 그런 '나'에 빠
져서 헤매는 스스로 자유를 회복, 백해무익한 고생을 하는 자기를 구원, 이런 3박자
가 더 나아 가서는 주변으로 점차 퍼져 나가면 "그 어떤 일이 벌어지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