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떠났다. 저 세상으로 갔다.
죽은 사람의 몸이 여기 있는데, 무엇이 저세상으로 갔다는지...
그 보다 저 세상이 도대체 어디이길래 "저(彼)"라고 하는 걸까?
고뇌에 묶이고 잡히고 갇힌 차안(此岸= 이 세상)을 떠나,
해탈(解脫 =풀리고, 놓여나고, 벗어나는)을 찾아서 피안(彼岸)으로
가려고 수도(修道)에 나선다는 사람들은 과연 그 "저(彼)" 세상에 갔던가?
먼저 "이 곳"/"저 곳", "여기"/"저기", "이 세상"/"저 세상", "차안"(此岸)/
"피안(彼岸)" 이라는 상대적 단어를 사용하여 "어딘가(所)"를가리키는
그 지칭자(指稱者)의 정체가 무엇인지 부터 명확히 밝혀야 한다.
예컨대 "이 곳"이니, "여기"라고 지칭하는 곳(所)에 두 가지 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1), 지칭자인 [내] 스스로 있는 곳(예컨대 몸통?)을 지칭하기도 한다.
2). 지칭자 스스로(自)가 있는 곳이 아닌, 다른 특정한 곳(예컨대 작전
지도상 특정한 곳을 "여기", "이 곳", 그와 딴 곳을 "저기" 또는 "거기"로)
상대적으로 구별하여 지칭하기도 한다.
위 1)의 "이 곳"과 2)의 "이 곳"은 전혀 딴 곳 이다.
그런데도 그 둘이 같은(하나, 동일인) 것 처럼 여겨지기 때문에 인류의
오래이고, 광범한 착각과 동일시라는 거대한 함정이 발생한다.
바로 내가 저 곳에 있는 것 처럼, 저 곳에 있는 '나(他, 客)'를 [내] 스스로
(自,主)인 것 처럼 여겨지게 되는 번뇌, 고뇌라는 함정이기도 하다.
위의 1)에서 "[내] 스스로(自) 있는 곳" 다음에 ? 표시를 한 이유가 있다.
"여기"니 "저기"니 하면서 지칭하는 [내] 스스로(自)가 있는 곳이 몸통이라
는 말이 크게 보자면 맞기도 하면서, 엄밀히 보자면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 사람이 지구에 있다는 말이 맞기도 하면서 구체적으론
부정확한 것과 같다.(세종시라 하거나, ㅇㅇ동이라 하거나, ㅇㅇㅇㅇ[아파트]
라 하거나 역시 마찬가지다)
왜냐, [내]가 이 몸통의 어느 곳에 있는 무엇인지를 정확히 밝혀서 ,
그 이외의 것이 있는 곳과 정확히 구별한 다음에 "(내가 있는)이 곳",
"(내가 있는) 여기"를 "차안(此岸)"이라 해야 맞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람인 내가 지구인 여기에", "우주인 여기에", "대우주인
여기에" 있다고 하는 것 처럼 -[내] 스스로의 정체와 있는 것이- 정확하지
않고 애매 모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 하는 [내] 정체와, [내] 있는 곳(此岸)의 위치(所在)를 밝히려는
일을 깨달음을 얻으려는 명상, 참선, 구도여행등 수도(修道) 생활이라고 한다.
그런데 조금만 진지하게 성찰해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내]가, [내]를 찾으려 하다니.....
이미 [내]로 있으면서, 어디 가서 무엇을 [내]라고 찾고 만날 수 있다고?
"[내]가 아는 것 중에서 그저 [내] 아닌, 아는 것(대상) 일체만 제외하면
남는 것은 오직 [내] 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차려서 알기가 어려운
일인가?
[내]가 "내 자신"이라고 알고 있는 것 모두가 내 아닌 근거는,
그 것이 [내]가 아는 것(대상)이기 때문이다.
소위 "내가 아는 내(또는 나, 자기) 자신"이 가아(假我)라서 진정한 나(眞我)
를 찾겠다면, 두뇌 속에서 작업(깨닫기)하면 단순하고 쉬운데, 밖으로 구도
여행은 왜 가냐고 !?
또, " [내]게 알려지는 것 일체(두뇌속 意識)가 저 곳(彼岸)에 있으니,
그와 마주 대하고 있는 [내] 있는 곳이 이 곳(此岸)이구나..." 하고
차려서 알기가 어려운 일인가?
또, "[내]가 알고 있는 "서울에 있는 거대한 롯데 빌딩"이나 "금강산"이,
[내](此岸) 건너 편(彼岸)에 있는 의식계의 극히 미세한 기억소자로 그
실체가 공(空)임" 을 차려서 알기가 그리도 어려운 일인가?
이상 [내] 있는 "여기(이 곳)"와 [내]게 알려지는 것이 있는 "저기(저 곳)"
라는 단어 말고,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의 뜻은 다르다.
마음(心)이라 칭하는 강 이나 골짜기가 있고, 그 양 쪽에 언덕(岸)이 있어서,
[내]가 있는 쪽을 차안(此岸=이 언덕), [내]게 보이는 강 건너편을 피안
(彼岸=저 언덕) 이라 칭한다는 뜻 이다.
그 중간의 강을 바다라 하기도 하고 마음(意識)을 심해(心海)라 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만 말 하자면,
바다처럼 넓은 강인 심해(心海)를 사이(間)에 두고,
이 언덕(此岸)에 [내] 홀로 있고, 저 언덕(彼岸) 너머에 실재계가 있다.
[내]가 마음바다를 건너 실재계로 갈 수도 없고, 실재계에 있는
무엇이라도 마음바다를 건너 [내]게로 올 수도 없다.
단지 실재계가 그 사이(間)에 의식으로 반영될 뿐 이고, [내]가
그 의식을 매개로 하여 [실재계]를 안다는 식으로 연결될(?) 뿐 이다.
[내]가 아는 것(意識)은 모두가 마음 바다에 있다.
그 마음 바다에 있는 것을 [내]라고 아는 것을 착각, 그 마음 바다의
상황을 [실재]라고 아는 것을 혼동, 그런 착각과 혼동을 "마음에 빠졌다"
, "정신이 빠졌다"고 한다.
차안(이 언덕)에는 [내] 홀로 있구나...하는 것이 깨달음, 자각이다.
피안(저 언덕) 너머에는 이 몸에 있는 그 어떤 마음(의식)과도 무관한
실재계가 있구나 하고 아는 것을 뭐라고 해야 하나.....?
두뇌 바깥의 실재계는 그 있는 그대로 흐른다.
사람들의 의식대로 존재하지 않고, 사람들의 의도대로 되는 것
같다고도, 안 되는 것 같다고도 여겨지지만, 그 이치대로 흐를
뿐 이지, 사람의 원, 불원 작용 때문이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의 순리(順理)를, 이치가 따른다(理順?)고 알다니....
[내], 두뇌 속 여기(此岸)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있다.
[내]앞의 심해 속에 온갖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살고(?) 있다.
두뇌 밖 진정한 실재계는, 그저 공(空)과 색(色)이 항상 변하면서 흐른다.
불생불멸, 무시무종, 영원불변인 허(虛)에
부증불감, 불구부정, 제행무상인 공(空)의 흐름이 있을 뿐 이다.
[내](열반인 此岸) - "의식계"(心海) - [실재계](마음이 없는 寂靜인 彼岸)
[내]가 의식계에 있는 것 처럼 착각, 혼동에서 속박, 묶임, 갇힘이란 번뇌.
[내] 스스로 깨달음으로 위의 번뇌가 저절로 해소됨(해탈)-> 본래의 열반.
실존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재계에 살고 있다.
그 [사람]의 정신인 [내]가 아는 것은, [내]와 [실재계] 사이에 있는 의식
이라는 바다와 같은 곳에 떠 올라있는 의식뿐 이다.
따라서 [내]가 알 길이 전혀 없는 [실재계]를 알수 있게 안내역을 하는
것이 의식계이고,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아는데 장애가 되기도 하는 것이 의식계이다.
비유하자면 보지 못 하는 사람에게 길을 제대로 안내하기도 하고,
고의나 과실 내지는 능력부족으로 엉뚱한 곳, 험난한 곳, 위험한 곳
으로 안내하기도 하는 안내자 같은게 사람의 의식계이고,
그 안내자를 지도, 교화, 통제하는 기능이 바로 [내] 자신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