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일은, "오직, 사람이 하는 일(行)의 결과로 되는 일(化)" 뿐이다.
그 이외의 일은 사람의 일이 아니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으로서의 일을 다 하고, 결과는 하늘의 처분을 기다리라"는 뜻이다.
첫째, 사람으로서 할 수 있고, 하면 필요, 유익한 결과가 발생할 가변성이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라는 뜻과 그렇지 않은 일은 하려고도 말라는 뜻이다.
(예 : 응시준비에만 집중하고 게임 같은 것을 하지 말라는)
둘째, 사람이 제 스스로 결과를 정하기는 고사하고 알 수 조차 없는 일은,
되는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말고, 오직 하는 일에만 집중하라는 뜻이다.
(예 : 당장은 알 수 없는 합격여하는 연연치 말고, 응시준비만 집중하라는)
자, 그렇다면 "행복(幸福)"은 그 하기(行)와 되기(化) 모두가 사람을 위하여,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사람의 일인가?
결론만 말하자면 그렇다.
"행복"은 "행복 아님(不幸)"과 상대적인 언어이니 오직,
두뇌 속에만 있는 소위 개념물인 "행복의식(幸福意識)"의 일부인 마음(意)
일뿐, 그 이외에는 어디의, 무엇에, 어떻게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건강한 몸이나 부유한 재산, 아름다운 몸매의 어디에서도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낌새조차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으리니....
"행복"과 "행복 아님"이 두뇌 속 상대적 언어이니, 두뇌 속에 반드시 2개
이상의 정보(識)가 비교나, 평가, 판단등의 대상과 기준의 관계로 상대화
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중의 하나(a識)에 "행복"이란 상대적 언어(예:불행)가 연결되면,
그 언어와 상대적인 언어(예:행복)는 딴 것(b識)에 연결되게 마련이다.
그런 상대화가 생기지 않거나 없어지면 상대적 언어(예: 행복과 불행)도
없게 된다.
"행복하기"는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두뇌 속에서 "행복"이라는 이름(名)의 의식(意識)을 짓는 일이다.
내면적 행복 만들기라 할 수 있다.
이 일의 결과물인 "행복의식"이 없으면, 무엇이 행복인지(무엇을 행복이라
하는지) 알 수도, 실행할 수도 없다.
이 작업을 잘못하면 실현은 고사하고 실행조차 할 수 없거나 매우 곤란한
"행복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둘째는,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는 일을 "실현되게끔(현실化) 하는(行)" 일이다.
외면적 행복 만들기라 할 수 있다.
"하는(行)"과 "되는(化)"이 따로가 아니라, 그것이 선후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바로 사람의 일이라는 근거이다.
하기는 본인이 하고 되기는 타인이나 세상,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과
다른 것이 오직 그 사람의 일인 행복되게 하기라는 일이다.
먼저 하면(行), 나중에) 되게끔(化)이라는 조건적 결합이다.
따라서 하고(行) 난 다음에 되지(化) 않으면 행복을 함(行)이 아니거나 없었기
때문이다.
설계(의식화)부터, 실천까지 오로지 자기(본인)의 [내] 자신만이 스스로(自)
할 수 있는 것이 행복 만들기이다.(그래서 오직 사람의 일이다)
하늘도, 부모도, 스승도, 철학자도, 정부도, [붓다]도, [예수]도, 하나님도
어떤 개인을 행복되게 할 수는 없다.
믿는 것은 내 자유이지만, 되는 것은 대우주의 일 이이므로.
그렇지 않은가?
소위 "전지전능하시다"는 하나님이라도 무슨 수로 이 몸의 두뇌 속에 행복
의식을 만들어(造心) 주고, 그것을 실행하여(行), 실현되게끔(化) 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너는 행복하다"라고 해도 "아니야, 나는 불행해"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니까.
물론, 그와 반대도 마찬가지이고....
따라서 "복 되기(幸福化)"는 복 되게 하기(幸福行)"의 결과로만 일어나는
일이지, 특정의 타인이나 세상, 하늘이 되게 하는 일이 아니다.
오직 [내] 스스로(自) 복 될 일만 하면 복 안 될 수 없고, 복될 일 하지 않고
나 못 하면 복 될 수가 없다는 게 가히 불변의 법칙(?)이다.
그러니 불행하다고 한탄, 원망하지 말고 [내가 행복되게 하기를 않았었
구나....]하고 참회함이 마땅한 일이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행복을 원하고, 불행을 원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싫어한다.
그리고 친근한 사람에게 일상적인 인사처럼 "행복하라", "복되게 살아라"
는 등등의 말을 주고받지만, 그게 아무 효용이 없다는 걸 모른다.
왜 그런 말이 효용이 없을까?
첫째, "행복"의 정체(두뇌 속 행복이라는 말의 뜻)를 모르는 줄도 모르고,
잘 안다는 맹신(믿는 줄도 모르는 믿음)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행복이지.."라고, 잘 알고 있다는 식의 맹신에.
행복을 알아야 설계하여 짓고, 되게, 할 수가 있는데도 말이다.
모르는 행복을 어떻게 짓고, 어떻게 하고, 하지도 못 하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둘째, 정체조차 지극히 애매모호한 "행복(?)"을 갈구하고 추구하느라
아무리 애쓰고 기 쓴들 "구체적으로 무엇이 행복이라고 되게끔 할 수"
도 없는데 어떻게 행복이 되겠는가?
셋째, 그 정신(즉, [내] 스스로)이란 것이 스스로 깨닫지(自覺)를 못 하고
두뇌 속의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意慾) 나(我相)"의 처절한 몸부림
을 [내] 스스로의 현실인 것처럼 착각, 혼동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기라는 사람을 행복되게 살게(生命) 하라(運命)]는 본분을
지고 있다고 깨달으면, 두뇌 속에 "행복"이라는 이름의 집을 어떻게
지을 것 인지 설계를 성실히 할 것이고,
그런 다음에, 그걸 어떻게 실행하면(行) 실현될(化) 것인지 인과적
추리를 정확히 한 다음에 실행할 것이고, 그러면 될 확률이 높을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반대로, [내]가 우매하여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는 줄도 모르면서
제대로 안다는 맹신에 빠져 있으면서 엉뚱한 일을 소위 "복 짓기"랍시고
아무리 추구, 노력한들 안(不幸)될 수밖에 더 있겠는가?
특히, 아무리 바라고 원해도 될 수 없는 일을 행복이라고 바라고,
아무리 하고 싶어 해도 할 수 없는 일을 행복이라고 하려고 애쓰고,
아무리 하고 싶어도 했다간 크게 낭패 볼 일을 행복이라고 하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상습적인 과음, 마약, 도박, 사기, 도둑, 난폭등)이
드물기만 하지 않는 것은 그 정신의 우매함 때문이다.
이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누구나 쉽게 행복되게 할 수가 있다.
반면에, 이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누구나 쉽게 불행에 빠질 수 있다.
될 수 있고, 할 수 있고, 하면 될 수 있는 일 중에서
자기의 삶에 필요, 유익한 일을 그 정도에 맞게 되게끔(化) 하는(行)
일에 집중하기가 복잡한가, 어려운가, 힘겨운가....?
될 수 없고, 할 수 없고, 했다간 불필요 유해한 일이 되어 크게 낭패
볼 일을 "안 되어서", "못 해서", "포기할 수 없어서" 속 상한다는 등
불행되기, 그 실태를 알기가 어려운가....?
23시를 훨씬 지나서, 이제 맛있게 식사를 하면 행복이지...
지금, 당장에 행복하지 않으면 언제 복되게 살건지.......
그런데, 행복되게 하지 못하면 불행하고 될 수밖에 없는,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상대적인 마음의 차원을 초월해 있는
[내] 본래의 이 자리를 만끽(?)하는 지복(至福)의 경지는 또 어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