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리운(또는 미운) 사람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안다"는 사람도 있지만,
모르는 줄도 모르면서 아는 줄 아는(盲信) 사람이 훨씬 더 많다고 짐작한다.
자, 사람들이 말 하는 "그리운(또는 미운, 이하 같다) 사람"에 해당된다는
특정의 그 사람이 어디에, 어떻게 있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말할까?
1). "가까운 곳에 살고 있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2), "지금은 죽고 없다"고 답하는 사람도 있다.
3). "이민 가고, 소식이 없어서 모른다"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다.
4),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른다"라고 답하는 사람도 있다.
5). "이 몸의 두뇌 속에 의식(意識=공(空)으로 있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없더라.
위 1)에 해당되는 (대상자를 가까이 두고 있다는) 사람에게
"왜 "그립다(또는 밉다)" 하기만 하면서 만나지 않고 보복하지 않느냐?" 물으면
"할 수 없으니까, 해도 안 되니까, 하면 안 돼니까 못 하지" 한다.
"그런(안 되고, 못 하고, 안 돼는)데도 왜 그립다, 밉다 하고 있는데?"
"만나고 싶고, 보복하고 싶은데도 못 하니까 괴로워서",
"괴로우면 욕망을 깨끗이 버려야지...., 못 하니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걸 하고 싶어 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괴로움을 받지"
"그게 마음대로 쉬운가?"
"그대가 스스로 그런(안 되고 못 하는 걸 바라는) 백해무익한 마음을,
그렇구나... 하고 확실히 알기(確認)만 하면 되는데,, 그게 어렵고 힘들어?"
[내] 스스로 "실행, 실현 불가능한 마음을 버리자, 가능한 일을 마음먹자"고
결의(決意)하기가 진정 어려운 일인가?(
위의 "죽고 없다"는 2), "모른다"는 3)과 4)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대답은
기이하지 않는가?
"없다"면서, 없는 것을 그립다 하다니 바보나 하지...
"모른다"면서 무엇을 보고(알고) 그런 사람 운운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른다면 "그리운" 마음이 연결될 대상이 없는데, 도대체 누구(무엇)를
그리워한단 말인지....
그들은 "그리운 사람"의 정체를 몰라서다.
단순히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뇌 바깥에 있거나, 있었던, 있을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서다.
엄연한 사실은, 사람의 두뇌 바깥에는 현재로만 70억 내외의 온갖 사람이
있지만 그중에 어느 하나도 "그리운 사람", "미운 사람", "고마운 사람"은 없다,
혹시 이의가 있으신 분은 전자 현미경까지 활용하여 확인해 보시기를......
그리운 사람은, 사람의 두뇌 속 어떤 사람에 관한 정보(기억이나 상상인 識)에
연결된 상대적 언어(意)인 "그리운/그립지 않은"이 연결된 하나의 의식(意識)
일 뿐이다.
단적으로 위와 같은 의식(意識)으로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두뇌 바깥의
실제적 사실(實在)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實在)이 내가
그리워하던 사람이야" 하는 경우는 어떻게 된 일일까?
바로, 그리 말하는 그 사람의 두뇌 속 "그리운(意)+그 사람(識)"이,
지금 눈앞에 있는 [그 사람]에 투사(投射), 투영(投影)되어 그렇게
보이는 일종의 환상적 경험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눈앞에 있는 [그 사람]을 보면서
a는 "저 사람이 내 그리운 그 사람"이라 하는데(의식의 투사, 투영)
b는 "그래? 나야 별 마음이 없는데...." (無心))하는 것은 그 마음(意識)이
다르기 때문 말고는 아무 윈인도 없으니까.
여기까지 이해하기는 어렵다면 매우 어렵다 할 수 있지만, 쉽다면
너무나 쉽다.
필자의 글 그대로를 실험해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으니까.
이제 "그리운(意) 그 사람(識)"이, 하나의 의식(意識) 임을 알았으니,
그것이 곧 공(空)과 같다(=)고 한 제목의 뜻을 밝힐 차례이다.
"그리운 사람" = "공(空)"이라고 한 근거를.
여기서 공(空)은 우리말로 "빈(虛)"과는 전혀 다른 뜻이다.
오히려 빈(虛)과 반대인 물질(實)과 같은 뜻이다.
공(空)은 허(虛)와 실(實) 사이에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엄연히 실(實)로
있다.
공과 공 사이(空間)는 있어도, 허와 허 사이(虛間)라 할 것은 있을 수 없다.
허공(虛空)은 "비어(虛) 빈(空)"이 아니라, "허(虛)에 공(空)이 있다" 또는,
"허(虛)에 공(空)만 있다"는 뜻이다.
단지, 물질이되 극초미세(極超微細)하여 사람이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차원을 뜻 한다. (0.00000000000000000000000000....... mm 미만보다 작은)
모든 물질이 공(空)의 흐름으로 생(生), 주(住), 이(異), 멸(滅)하여
공(空)이다가, 다시 물질로 생주이멸한다.
그러니 모든 것(諸行)이 무상(無常=항상 변함)일 수 밖에.
비유하자면 밀가루가 인형이 되어(生) 있다가(住) 조각나고 가루로 변하여
(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보다 작아져서 없는 것처럼인 상태(滅)이다.
공(空)은 영구히 줄어들지도, 없어지지도 않는 단위(?)이다.(질량불변)
그러니 색(色, 물질)이 곧 공(空), 공이 곧 색(색즉시공 공즉시색)이다.
고로 공과 색이 다르지 않다(공불이색, 色不異空)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두뇌 속에 있는
지구의식, 태양계 의식, 은하게 의식, 물질우주 의식, 허(虛)를 포함하는
"대우주 의식"의 질량은 얼마나 될까?
그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60톤 넘는 대형탱크가 우리 두뇌 속엔 얼마 나의
질량으로 의식되어 있을까?
그 보다 더 작은 70kg 남짓인 사람에 관한 "그리운 그 사람" 의식의 질량은
과연 얼마나 될까?
주먹 크기만 한 용적의 두뇌에 저장 가능한 의식의 수량은 사실상 무한하다.
저장용량 무한(無限)은 "한정되어 있음이 없다"는 뜻이지, 두뇌 자체의
크기나 용적이 무한대(無限大)라는 뜻이 아니다.
주먹 크기인 두뇌 용적을 500cc라 가정하고, 저장되어 있는 의식의 수
(數)를 1억이라 가정한다면 "그리운(意) 그 인간(識)" 의식 하나의 질량은 과연
어느 정도인지 산출해 볼 수가 있다.(대충 1/200,000 cc, 전자 현미경에 나타날
정도인지?)
살아오면서 저장되어 있는 의식의 수량은 엄청나다.
그 엄청난 의식들 중 하나에 불과한 "그리운(意) 그 인간(識)"을 공(空)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이상을 이해하고 나면
[내]가 지금껏 공(空)을 잡고 씨름하고 있었다니... 하고 웃지 않겠는가?
지혜로 비추어서 보니 모두(色受想行識)가 공(空)인 것을 이제야 알다니..
그렇게도 그리워 한 그 사람이,
그다지도 원망하고 증오한 그 인간이,
너무나도 후회스러운 그 일들이 모두가 공(空) 임을 알면서도 그 환상에
빠져서 헤매는 정신은 우매하여 무자비(자기와 주변을 해치니까) 하다..
차 안(此岸)의 적멸 고요를 모르고 피안(彼岸)의 사바세계에 빠진 것처럼
끊임없이 헤매고 있는
"정신이여 갓떼 갓떼 파라가 떼 파라상갓떼 모지사바하..."
[사족 하나],
공무도하(空無渡河 = 공(空)을 "물질이 없는" 허(虛)와 같다 거나, 감각
가능한 물질로 여기는 오해의 강을 건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