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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疑心), 불신(不信)하는 지혜.

나 아닌 내 2024. 11. 28. 20:40

먼저 단어의 뜻부터,

1) 직역하자면,
"의심(疑心)" : 마음(意識)에 의문(疑)을 연결함.
"불신(不信)" : 믿지(信) 않음(不).

2) 통상적인 용어,
의심(疑心) : 어떤 대상(주로 사람)이 감추고, 위장하여 속인다고 봄.
불신(不信) : 어떤 대상의 진술이나 주장을 허위 내지는 반대라고 믿음.

통상적으로는 불신과 의심을 같은 뜻으로 혼용하고 있다.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不信) 의심하다니...." 하는 것이 그런 예이다.

"의문(있음)"은 "의문 없음"과 상대적인 언어, 즉 두뇌 속의 어떤 정보(識=
대체로 언어, 문자, 사진 형식)에 연결되는 "의문 있음/ 의문 없음"마음(意 )
이지, 두뇌 바깥의 그 무엇을 지칭하거나, 그 무엇을 서술하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두뇌 밖의 그 어떤 사람, 물건, 일, 현상, 그 무엇에도 "의문"이라 할
만한 사실이 추호도 없다. (단지 "의문 운운"인 말 소리나 글자 모양이 있을
뿐이다.

이상의 설명은 "믿음(있음)" / "믿음 없음" 또는 "안 믿음"과 "그대로 믿음/
"그대로 안 믿음" 또는 "반대로 믿음"에도 꼭 같이 적용된다.

따라서 자기 두뇌 속에 있는 "의문"이나 "믿음"이라는 말(좁은 뜻의 마음인 意)
을 특수한 기호(말 소리나 글자)의 형식으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그 소리나 글자
속에 "의문"이나 "의심", "믿음", "불신"등 마음 자체를 담아낼 수는 없다.

단적으로 "너를 믿는다"는 소리(형식)를 낼 수는 있어도, 그 소리에다 [믿음]을
담아낼 길은 없다.
고로 "믿음을 주고받는다"는 헛소리가 있을 뿐이다.

단지 믿음을, 의심을 "담아낸다"라고, "담아 보내고 받는다"라고 터무니없는 오인을
할 뿐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사람의 정신(이하 [내]라 한다)이 아는 것은 "오직 그 순간에 [내] 앞에 떠 올라있는
마음(識, 意識, 意思등)" 뿐이다.

따라서 믿는다 해도 오직 그것만 믿을 수 있고, 안 믿는다 해도 오직 그것만을
안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소위 "진실"이라 하는 것 또한 두뇌 속의 "비진실", "거짓", "가짜", "허위"등과
상대적인 언어(즉 의식 중의 義부분) 일뿐, 두뇌 밖에 있는 사실에는 추호도 없다.

특히 사람이 말하는 "이러저러한 사실(사람, 사물, 일, 현상 등)"은 그 형식인
"말소리(공기의 진동음)" 이상도, 이외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걸 듣고 난 다음에 두뇌 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중 그 어느, 하나이다.

1). 그 말 그대로에 해당되는 사실이 실제로 있는 것처럼 의식된다.
2). "설마(舌魔:혓바닥으로 장난?), 그럴 리가 없다"라고 의식(무시)된다.
3), "긴가 민가 의문스립다" (그 말로는 알 수가 없다"라고 의식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상 세 가지 마음 중 하나로 멈추고, 그치고 만다.
더 이상 알아보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를 모르는 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에,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알면 제가 알고 있는 위의 세 가지 마음
그 어느 것으로도 알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만들 수가 있다.

그 보다 더 지름길이고 빠른 방법이 바로 위의 세 마음에 대하여 의문을 연결
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남의 말 그대로를 실제 사실인 것처럼 여겨진 마음(위의 1)에 대하여
"무슨 근거로 말(소리)을 사실과 동일시하지?" 하는 의문이다.
"훔쳤다", "죽였다" 하는 자백이나 진술을 증명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하는 의문.

위 2)의 마음에 대하여도 "그렇게 무시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위 3)의 마음에 대하여도 "그렇게 의문스럽네.. 하고 그치면 알 필요가 해결되는
가?" 하는 의문을 연결할 수가 있다.

여기서 "의문(疑問)"을 통상적인 "의문"과 [자문(自問)}으로 구별하고자 한다.

[자문]은, 그 사람의 정신인 [내]가 스스로(自) 필요여하와 정도를 검토,
결정하여 그 필요를 해결하기 위하여 [알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의문이 필요하
다]고 만든 의문이다.

반면에 "의문"은 [내] 스스로의 관여가 거의 없이 두뇌 속(의식계)에서 기계적,
조건 반사적, 즉흥적으로 일어나는 "의문운운" 하는 말이다.
물론, 그런 "의문 운운"도 [내] 스스로(自) 검토하여 승인, 부인할 수가 있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승인된 것은 [자문]과 같게 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은 "의문"으로 그칠뿐 사실상 무시되고 만다.

너무 장항 하게 돌아온 것 같다.
[내]가 아는 유일 무이한 것이 [내] 앞에 등장해 있는 마음(意識)뿐이니,
그것을 매개로 하지 않고는 두뇌 바깥의 실재계를 알 길이 없다.
그런 점에서 마음은 "실재게를 아는데 유일한 도구이니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
할 수가 있다.

반면에, [내]가 두뇌 바깥의 세계를 아무리 정확히 안다고 확신해도, 그것은
마음을 아는 것뿐인데, 그 마음이 "실재계와 달라서 오인, 오해, 오판이 일어나면
인생에 편리가 아닌 장해(障害)가 발생하고 크게 위험할 수도 있다" 할 수도 있다.

종합하자면 "마음"은 "실재계를 아는데 필요(善) 악(惡)"이라 해야 올바르다고 본다.
그러니 마음을 믿지 말고 의심할 필요가, 그것도 적지 않다는 게 이 글의 이유이다.

이제 목적도 저절로 밝혀 지리라.
마음을 믿지(특히 믿는 줄도 모르고 빠지는 맹신) 말고, 마음에 자주 의문을 연결함
으로써 실재계를 정확히 알고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유익한 마음으로 다루는 일을
성실히 하여 삶을 주체적, 목적적, 합리적, 효율적으로 운전코자 함이 이 글의 목적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