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것"은 그 "모두(一切)가 오직(唯) 마음(心=意識)" 뿐이다.
소위 "일체유심(一切唯心)"이다.
[내]와 "것" 사이(間)에서 둘을 주체와 객체로 연결하는 것이 "아는(知
또는 觀)" 이라는 일(행위)이다.
[내](주체)가 보니, (객체가) 보인다는 관계이다.
그런데 이 아는 일(知行)은 엄연히 주체인 [내]게 속하지만,
[내] 스스로(自) 주도하지 못 하면 마치 마음이 내게 알려 주는 것만
알게 되는 것처럼, [내]가 마음에 종속적이게 된다.
객체가 보이니, [내]가 본다는 식의 관계이다.
쉬운 예로 "꼴 보기싫으니 보이지 말라"(꼴 보이지 말라 보기싫다"),
"보기싫으면 보지 말지"("제가 보고는 보기싫다 하다니...")
이런 언쟁을 하는 경우가 더러 있더라.
실제로는 마음이 [내]를 주도할 수도 없고, [내]가 마음에 종속될 수도
없지만,
[내] 스스로의 깨달음(自覺)이 없고, 스스로의 능력(지혜)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면, 어린 시절에 부모나 가까운 사람들로 부터 학습된
그대로를 따르기만 하던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 하게 되고,
그러면 두뇌에서 저절로 형성되어 떠오른 마음 그대로만 (사실상
종속적으로) 아는 데 그치게 된다.
[내]게는, 조금만 확인해 보면 두뇌에게 [말]로 명령하여 감각기관(5官),
사고기관(두뇌속 의식계), 운동기관(隨意)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거의 무한으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능력중의 하나가 바로 마음 다루기(새로 만들기, 고치기,
바꾸기, 버리기등) 이다.
이 [마음 다루기]를 [내]가 스스로 말미암아서(자유롭게) 하느냐
여하와 그 정도에 따라서 [내] 스스로 마음을 주도하는 [주도형]
과 [내]가 사실상 마음에 종속적이게 되는 "종속형"이 되기도
한다.
자 "일체유심"은 누구도, 추호도 예외일 수 없는데,
{주도형]이면 일체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종속형"이면 일체로 부터 부자유(속박, 감금)를 면키 아려울 수
밖에 없지만, 이런 구별을 할줄 아는 이 극히 드물다니......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괴로움의 모두가 "종속형"에게만
있고, [주도형]에는 있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는가?
어느 주인이 제가 거느리고 부리는 종(從) 때문에 괴로움을
겪고 있겠는가?
종 때문에 괴로우면 종을 혼내거나 쫓아내고 말지...
[내] 스스로 주도하여 마음을 다루기로 한다면 어떤 마음은
살려서 요긴하게 활용하고, 어떤 마음은 고치거나 바꾸거나
없애서 부작용, 역효율이 발생치 않게 단속하지 않겠는가?
현명한 [내]라면,
자기를 위히여(주체 爲主), 그의 삶을 안전, 건강, 순탄, 조화롭게
운전함을 목적으로, 마음을 주체적, 능동적, 목적적, 합리적,
효율적으로 관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성실히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우매한 정신이라면,
마음이 알려주는(?) 그대로가 제 뜻(自意)인줄 알고, 따르려고
노심초사 악전고투 하고도 불평,불만, 실망, 좌절에 빠져서
헤매기 일쑤가 아니기 어렵게 된다.
그리운 사람을 만날 수 없어서 괴롭다 ,
원망스럽고 미운 인간을 어찌할 수 없어서 괴롭다,
다, 우매한 정신이 빠지는 마음이다.
괴로움을 일으키는 마음을 왜 품고 있어!?
될 수 없고, 할 수 없고, 하면 안 돼는 일을 바라는 마음,
그걸 왜 그냥 두고 있어!?,
현명한 정신에겐 너무나 쉬운 해답이다. "바보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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