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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알기(自智)와 알게 되기(被知)의 구별.

나 아닌 내 2025. 3. 19. 14:37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서 30분간 소위 만남을 가진다고 가정하자.
[내]가 그 사람을 안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무엇일까?
또, [내]가 그 사람에 관하여 모른다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 무엇일까?

위의 질문은 우리(사람들의 정신)가 안다느니, 모른다느니 하는 모든 경우에
같이(共히)해당된다.

결론적으로만 답하고자 한다.
[내]가 "그 사람을 안다"고 하는 말은 전적으로 터무니 없다.
고로 "내는 그 사람을 전혀 알 수가 없다"고 해야 맞는 말 이다.

왜냐, 이 사람의 두뇌 속에 있는 [내]가 두뇌 바깥에 있는 그 사람 자체를
무슨 수로 알겠는가?

단지, 이 두뇌 속에 형성되어 떠 올라있는 그 사람에 관한 여섯 가지 정보
(色聲香味觸語)와 그 정보(識)에 연결되어 있는 나(我) 마음(意)을 알 수
있을 뿐 이다.
"그 사람(이 두뇌속 의식)을 안다"는 나의 마음을 믿음에 빠져 있을 뿐이다.

요약하자면,
1). 그 사람과 접촉하여 획득된 여섯가지 정보와 남으로 부터 전해 받은
언어(문자) 정보와
2) 그 정보들에 연결되어 있는 - 내 마음(自意)이 아닌- 나의 마음(我意)을
알 수 있을 뿐 이다.
그 이상도, 그 이외도 알 길이 없다.

이상은 나름대로 탐구와 실험등 확인을 거치기만 하면 이해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고는 너무나 난해하리라.

아는 능력을 지혜, 아는 내용을 지식이라 하지만,
아는 일을 [내] 스스로의 깨달음(自覺)을 유지한채로 지혜를 발휘하여 목적적,
합리적, 효율적으로 주도함을 스스로 차려서 알기(自智)라 한다면,
그저 알려지는 그대로를 다 안다는 듯이 맹신, 맹종하는 정신상태를 지식의 노예
(被知(라 할 수 있겠다.

누구나 태어나면서 부터 지혜를 발휘하는 사람은 없다.(붓다, 예수는 모른다만)
다만 어릴 때 부터 의문과 탐구심, 호기심, 통찰등 능력이 특출한 사람은
드물지만 더러 있었다고 본다.

그런 특출한 사람들이 소위 사람들을 인도하려는 일에 나서는 선각자, 선지자인
경우가 많다.

안 되는 일을 바라고,
못 하는 일을 하고싶어 하고,
하면 안 돼는 일을 포기하지 못 하는 등등을 바로 지혜가 미숙한 자들이 한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전혀 할리가 없는 일인데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