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두 가지 방향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하는 행복(行福)으로, 하는 게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하는(한) 복 이고,
되는 행복(化福)으로, 되는 게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 되는(된) 복 이다.
그런데 하는 복 이건, 되는 복 이건 간에 "무엇"을 하는, "무엇"이 되는 것이 행복이란 것 인가?
바로 이 "무엇"에 상당하는 이미지(현상, 기억, 상상의 識)가 있어야 구체적인 행복의 한면이 성립된다.
예컨대 "한달 수입이 5백만원 이상" 이라는 상상이나, "가족이 모두 함께 살고 있는" 이라는 현상이나, "몸에 아무 이상이 없던" 이라는 기억이라는 정보(識)가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위에 예시한 바와 같은 두뇌 속의 이미지(識)에 복(禍의 반대), 행복(불행의 반대)이라는 의미어(意)가 연결(부가)되어 있어야 한다.
"무엇이 행복이다"에 있어서 "무엇"에 해당되는 이미지(識)를 사실적인 행복의 요건이라고 한다면, 그런 이미지(識)에 연결(부가)된 의미어(意)를 의미(비교, 평가)적인 행복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행복은 위의 두 가지 요소중 그 어느 하나만으로는 성립하지 않고, 그 하나만 남아서는 존속하지도 않는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월 수입이 100만원인 사람의 두뇌에 "월 수입이 200만원(識)이면 행복(意)" 이라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게 실제로 이루어 지는 순간에는 행복을 느끼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 실현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것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욕망은 저절로 약화되고 해소되어 버리므로, 행복에 있어서의 이미지(識)가 새로(예:월 수입이 300만원이면...하는) 형성되기 전 에는, 과거의 이미지에 종속해 있던 의미(意)또한 저절로 해소되어 버리기 때문에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 이상의 탐색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첫째, 행복이라는 것은 [시소]와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 이다.
현실이라는 한쪽과 기대라는 반대쪽이라는 양면으로 이루어 져서, 그 중의 어느 하나가 높아지면 다른 쪽은 저절로 낮아지고(행복이나 불행감도 높아진다), 그 양 쪽이 서로 비슷하면 평형을 이루게 된다.(행복감도, 불행감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예컨대 [100만원 월수]라는 현실에 "100만원이면 적당하다"는 기대가 맞 물리면 행복하다도, 불행하다도 느껴지지 않는다.
"200만원 이라면(야) 행복" 이라는 욕망과 맞물리면 50%의 행복(50%의 불행)을 느끼게 되고,
"50만원 이라도 다행이지" 하는 만족치와 맞물리면 100%의 초과행복을 느끼게 된다.
둘째, 행복을 누리기 위한 방향에는 사실적인 방향과 의미적인 방향의 두 가지가 있다는 것 이다.
욋적인 사실을 기대수준에 이르도록 변화시키는 육체(물질)적 방향이 그 하나이고,
냇적인 기대 수준을 사실(가능성 포함)과 일치되도록 조절하는 심리(의미)적 방향이 다른 하나이다.
그렇다면, 위의 두 가지 방향 중에 어느 것이 실효적일까?
그 대답을 하기 전에 먼저 "실효"의 뜻 부터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소위 "실효없는 실효성 논쟁"의 반복적 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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