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아는 내게 알려지는) 나를 1인칭,아는 나의 상대인 너를 2인칭, 내가 아는 나(1인칭)도, 나의 상대인 너(2인칭)도 아닌 제3의 무엇을 3인칭이라고 한다.
1인칭은 2인칭일 수 없고, 3인칭일 수는 더, 더욱 없다.2인칭 역시 1인칭이나 3인칭일 수 없다.3인칭 또한 1인칭이나 2인칭일 수 없다.
그런데, 1인칭인 나를 아는 내(아는 주체)는 어디에 있는가?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내가 내 스스로를 알 길은 없다.
내가 내 자신을 알 수 없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그런 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왜 그럴까?
두 가지 원인 때문이다.
첫째는 논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아는 주체가, 제 스스로를 대상화할 수가 없다는 걸 모르고 오히려 잘 안다고 알고 있다.
둘째는 1인칭(나)을 알고는, 그 것이 내 자신인줄 착각에 빠져 있어서다.
쉬운 비유를 하나 들자면,
앨범 속에서 어떤 사진을 가리키면서 "이게 내 이다" 하는 이 에게, 그걸 내 라고 지칭하는 너는 어디에 있는 무엇이냐 하면, 이번에는 가슴을 툭 치면서 "이 몸이쟎아" 하여서, 그 몸을 지칭하여 내 라고 하는 너는 어디에 있는 무엇이냐? 하면
이번에는 뭐라 할까?
위의 풀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하나의 예를 들기로 한다.내(필자)가 너(독자)에게서 그(전두환)를 만난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가정하자.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는 나](1인칭)는 이야기 하는 너(2인칭)가 될 수가 없고, 이야기 속에 실제로는 등장할 길이 없는 실제의 그(3인칭)가 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나(1인칭)가 너(2인칭)로 부터 "당신(필자인 아무나)은 과거에 이렇궁 저렇궁나쁜 사람이다" 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나(1인칭) 자체가 그 이야기 속에 들어 갈 수는 없으니 3인칭이 될 수는 없다.나 에게는 너(2인칭)가, 나를 너(당신)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2인칭이 되는 것은 아니다.따라서, 나(1인칭)를 2인칭이나 3인칭으로 여기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착오일 뿐 이다.
자, 그렇다면 나(1인칭)의 정체는 의외로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일단은 먼저 적극적이 아닌 소극적 방법, 긍정적이 아닌 부정적 방법을 거쳐서 말 이다.1인칭을 직접, 적극적, 긍정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이 아니라, 1인칭은 2인칭도, 3인칭도 겸할 수 없다는 증명을 통하여 저절로 드러나지 않게 드러나는 (기묘한) 방법이다2인칭, 3인칭에 등장 가능한 것은 그 무엇도 나(1인칭)가 아니라고 부정하고 나서, 그러고도 대상이 아닌 아는 주체로서만 있는 것 같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오직 유일한 하나가 바로 아는 나 라고 깨닫는 방법이다.(설명하기 참 어렵도다)
구체적으로 말 하겠다.나는 너 만을 알뿐, 나 스스로를 너 로(2인칭으로 삼아서) 알 길은 없으니, 나 에게 알려지는 그 무엇도 너(2인칭)일 뿐, 나 일수는 없다고.나는 너를 통해서 그 것(3인칭)에 관한 정보와 의미(意識-이하, 통상적 용어인 마음이라 한다)을 아는 바, 너는 바로 그 마음(意識)이지 다른 무엇도 아니니, 나(1인칭)는 마음(2인칭)도 아니고, 마음의 대상이라는 그 것(3인칭)도 아니라고 앎으로써, 나는 오직 아는 자일 뿐 으로 그 어떤 방법으로도 나 스스로를 대상(2인칭)으로나, 새로 찾아서(3인칭)나 알 길이 없다는 -안다고 할 무엇이 없는- 희한한 앎 이다.
이제 누군가로 부터 너는 무엇이냐는 질문을 들으면 다음과 같이 답한다.나(1인칭)는 그저 그 무엇(3인칭)에 관한 마음(2인칭)을 알뿐, 나 스스로를 알 길이 없다.굳이 말 한다면, 잠들면 아무 것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아는 일 자체가 없다가, 깨어나면 마음을 알기 시작하는 정신이라고나 할까....
만약에 내가 "나는 이러 저러한 사람이다" 하고 (알고) 말 한다면 그건 착오라는 명백한 증거이다.바로 그 안다(알고)야 말로, 대상(2인칭)을 아는 것 이지 스스로(1인칭)를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스스로"가" 안다와 스스로"를" 안다의 혼동은 1인칭과 2인칭을 혼동, 전도하는 것 이므로.
또 만약에 "나는, 나(이 사람)를 이저 저러한 사람이라고 안다"
고 말 한다면 그 또한 착오라는 명백한 증거이다.
"나(1인칭)는 이 사람(3인칭)에 관한 이러 저러한 사람이라는 마음(2인칭)을 안다고 해서, 나(1인칭)가 2인칭이나 3인칭의 자리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 천억의 인류가 정신(1인칭)을 가지고 마음(2인칭)을 알면서 현실계(3인칭)를 살아 온 세월이 그토록 오래인데도, 사람들(그 정신)이 스스로를 혹은 2인칭으로, 혹은 3인칭으로 혼동하는 착오를 깨닫지 못 하는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그 원인중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바로 나(스스로)를 알 수 없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를 모름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나 아닌 것(혹은 2인칭, 혹은 3인칭)을 나 라고 여겨지는 착오(믿는 줄도 모르는 믿음이 착오이다)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의 원인은, 마음의 외형인 말(소리, 글자)과 마음의 내면인 뜻(意識), 그리고 실제의 사실이라는 세가지 별개의 차원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 하고 혼동하는데 있다.
예시하자면 "대" 라는 소리( 또는 글자)가 마음의 외형(표현)이고,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는 "대나무 이미지(識)와 항상 푸르러서 좋음, 곧은 절개, 유익한 용도등의 의미(意)"가 마음의 내면이고, 땅에 실제로 있는 그 것(그것 자체는 사람 마음의 외형이나, 내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여기서 상관(相關)이라 함은 상호관련이라는 뜻 으로서, 마음이사 대나무와 일방적으로 유관하지만, 대나무는 그 어떤 사람의, 그 어떤 마음과도 유관하지 않다는 뜻 이다.
단적으로, 대나무를 보고 마음이 형성될 수는 있어도, 마음이 있다고 대나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대나무는 다른 요인에 의하여 발생, 변경, 소멸한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말을 1인칭(아는 주체)으로도, 2인칭(마음 속의 자아의식)으로도, 3인칭(자기라는 사람을 지칭)으로도 혼동해서 쓰는데, 같은 하나라면 같은 이름을 쓰는게 당연하겠지만, 전혀 다른 것을 같은 이름으로 칭하면 혼동이 생기지 않기 어렵다.
예시하자면 나 스스로를 나, 내 이야기를 듣는 상대를 나, 내 이야기 속에 (이야기로) 등장하는 주인공도 나 라고 하니까 (예전의 나로선) 매우 어지러웠지만, 그게 혼동인 줄 모르는 사람은 전혀 어지럽지 않지.
아마도 그래선지, 내가 그게 혼동이라고 알려 주면 오히려 "네 말을 들으니까 어지럽다" 하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은가 보다.
자, 이 정도로 그치면서 마지막으로 이 글의 목적을 분명히 밝힐 차례에 이르렀다.
나(1인칭)는 자기와 그 이외의 모든 그 것(3인칭화 가능)을 알려 주는 상대인 마음(2인칭)을 삶의 필요에 빠짐없이, 정확하게 만들어 지고 쓰여지겠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당위명제를 밝히기 위해서다.
나를 마음과, 마음을 통해서 그 것과 혼동하면 그 혼동으로 부터 벗어나서 자유롭기가 매우 어렵고, 그러다 보니 나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데 장애를 첩첩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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