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인 "직관(直觀)"은 사전적인 뜻도 통상적인 용어로서의 뜻도 아니다.
오직 필자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적당한 단어라 판단하고 다음과 같은
뜻으로 쓰고자 한다.
두뇌 속의 정신이 의식을 대(對)하는 일 일체를 관(觀)이라 한다.
관(觀)을 직역하자면 "본다" 이지만, 눈을 거쳐서 외계와 접촉하는
"본다"(視)와는 전혀 딴 차원이다.(들어, 만져, 맡아, 맛을, 촉각을
본다는 말 모두가 눈으로 보는 일이 아니다.)
직관(直觀 : 직접 보기)이라 한다면, 간관(間觀 : 간접 보기)도 있다는
전제가 추리된다.
그렇다면 그 구별은 어떻게 할까?
예컨대, 갑 이라는 사람을 직접 만나 보는 일을 직관이라 한다면,
갑을 잘 안다는 을의 이야기를 듣고 갑을 만나는(?) 일을 간관이라
할 수 있으려나....
여기(이 글)에서 직관이라 함은, 두뇌 속 그 어떤 의식중에서 마음(意)
부분을 일단 무시하고 정보(識)만을 보는(아는) 것을 직관이라 한다.
좀더 넓게는 유사 정보도 보지 않고 그 정보에 국한하여 보는 것을
뜻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직관이 필요할까?
남의 마음은 물론이고, 자기 마음도 그 정보 그대로를 아는 일에
지장(정보의 오염)이 되는 수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그대로 보지 않고,
제 마음(두뇌) 속의 좋아, 나빠, 싫어, 무서워, 악질 등등의 마음을
거쳐서, 그런 마음으로 오염된채 알게 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또, "[내] 스스로(自) 직관하고 있다"고 자각하고 직관하면,
알려지는 대상이 두뇌 속 기억이나 상상인 정보(識 ; 그 본질은 너무나
미세하여 空에 가깝다는 것)일 뿐, 실제로 있는 사실도, 있었던 사실도,
일어날 사실도 아니라는 것도 쉽게 알 수가 있다.
이상을 바꿔서 말 하면, 스스로 자각하고 직관하지 못 하고, 내 앞에
등장하여 알려지는 것을 피동적으로 아는 수준에 머물게 되면,
그 정보(識)들 그대로(空)를 모르고, 오염된 사실 처럼 오인, 오해, 오판
에 빠지게 된다.
그냥 군 복무 시절의 옛 기억(識) 하나를, 마치 눈 앞에 있는 사실인 것
처럼, 거기다가 그 시절의 마음(미움, 불안, 공포등)으로 오염된 사실
처럼 알게 됨(여겨짐)에 빠지게 된다.
고민이니, 번뇌니,근심이니, 걱정이니, 고뇌니 하는 것의 거의 모두가
[내] 스스로의 직관 하나만으로 해소하기 어렵지 않다.
이 두뇌 속 먼지 하나의 1/1000 이나 되려나,,,하는 기억(識)임을,
거기에 어떤 마음(意)이 연결되건 말건 무슨 힘이 있겠냐고 알면
그 순간에 모든 고민등이 해소되지 않을 수 없다.
고민을 해결, 해소하여고 애 써야 할 일이 전혀 없다.
아무리 애 써도 실리(實利)는 없고 실해(實害)만 막심하니까.
그저 냉철한 자각으로 직관만 하면 필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