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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와 아는 그대로.

나 아닌 내 2006. 11. 7. 18:53

무엇이 있는가, 어떤 식으로던지 그 전부를 말해 보자.

아래에서의 첫째니, 둘째니 하는 것은 구별의 편의상 붙였을 뿐 어떤 순서를 나타냄은 아니다.

 

첫째는, 아는 나(정신이라 하마)가 있다.

둘째는, 아는 나가 들어 있는 이 몸(자기라 하마)이 있다.

셋째는, 이 몸에 생명(주인공)이 있고, 의식(마음)이 있다.

넷째는, 모든 물질이 존재할 바탕(공간)이 되는 본래의 허(太虛)가 있다.

다섯째는, 입자와 파동인 에너지(空,氣라고 하마)의 이합집산, 흐름이 있다.

여섯째는, 에너지의 흐름에서 생주이멸하는 동, 식물과 그 이외의 갖 가지 존재(그 또한 생명이 있는) 현상이 있다. 

 

자, 나(정신)가 "무엇이, 어떻게 있느냐?" 하는 물음에 답하려면, 그런 물음을 듣는 순간부터 이 몸의 두뇌속 의식계에 어떤 의식(들)이 떠 올라야만, 나는 그 것을 보(알)고 대답할 수가 있다.

결국, 나의 대답은 이 몸의 두뇌 바깥에 있는 그대로의 전부나 일부를 알고서 대답하는게 아니라, 오직 그 순간의 이 몸의 의식계에 떠 올라 있어서 (나가) 아는 그대로를 대답하는 것에 추호도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나의 "아는 그대로"는 -두뇌 바깥에, 실제로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 몸의 두뇌 속에 떠 올라있는 현현의식 그대로일 뿐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누구도 두뇌 바깥의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없고,

두뇌 바깥의 [있는 그대로]를 알고서 말할 수도  없고,

오직  두뇌 속의 "현현의식 그대로"를 알고 말할 수 있을 뿐 이다.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비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 몸의 앞에 홍길동이라는 이름의 한 사람이 있다.

나 어찌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나의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나의 말이 어찌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이리오.

 

나의 눈, 귀, 코, 혀와 그 밖의 접촉신경이 홍길동의 몸 -결코 전부일 수가 없는- 일부와 접촉하여 그 결과가 정보(시청각 정보인 색성향미촉의 5가지 識)로 이 몸의 두뇌에 입력된다.

나는 바로 그 정보가 떠 올라 있을 때만, 그 정보(들)을 알고서 말(대답)할 수 있을 뿐 이다.

 

자 우리는 여기서 [홍길동] 그 자체와, 이 몸의 감각신경계가 홍길동에 "대한"(상대한, 접촉한) 감각관계와, 그 관계로 부터 획득되는 홍길동에 "관한" 정보의 세 가지 다른 차원을 알아차리게 된다. 

홍길동 자체, 이 몸의 감각신경이 홍길동의 몸 일부와 접촉한 상태, 접촉으로 부터 형성된 이 몸 안의 정보의 세 가지는 아무리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더라도  엄연히 서로 따로이다.

[홍길동], 홍길동에 대한 접촉, 홍길동에 관한 의식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결코 동일한게 아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인류에게서 오랜 세월 동안, 이 세 가지가 동일시 되는 착각이 있어 왔다.

몰론, 착각이니까 착각인줄 조차도 모르고 있어 왔다.

그런 착각에서 "나는 홍길동을 잘 안다"는 확신에서 그런 대답이 쉽게 나오는 것 이다.

 

제대로 안다면 "나는 이 몸의 감각신경이 홍길동의 몸 일부에 대하여 접촉한 결과로 이 몸의 두뇌에 형성되어 떠 오른, 홍길동에 관한 정보에 대하여 알뿐, 그 이외의 홍길동 자체에 대하여는 알지 못 하고, 알 수도 없다"고 말 해야 하는데도.

 

또, 지금까지의 동일시라는 착각을 깨달아서 알아차린다면 "내가 지금까지 홍길동에 대하여 거의 다 안다고 한 것은 착각이었고, 사실은 홍길동에 관한 정보에 대해서만 알 뿐, 홍길동 그 자체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고, 알 수도 없다"고 하겠지만.....

 

이상의 탐색과 규명작업은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참과 차원이 다르며, 그 안다는 정도(정보) 또한 너무나 보잘 것 없다는 것을 알아차려서 알기에 있어서 스스로 겸손하고, 진지하고, 근면하고자 함 이다.

 

인생사 모든 성공과 실패가 바로 이 알아차림 여하에 있다.

예컨대, 홍길동과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영위해 가려면, 홍길동과 이 몸에 대하여(관하여가 아니다) 자주, 많이, 깊이 접촉하고 대화의 교류가 원활케 해야 한다.

그러고도, 그렇게 하여 형성된 (이 몸 안의) 정보가, 홍길동과 이 몸 자체를 그대로 반영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부족하고 어떤 면 에서 편협한 의미도 가미되어 있다는 것을 경계 또, 경계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를 싫어하고 성공을 원하고, 기대한다.

그러면서도 실패를 예방할, 성공을 실현할 일은 제대로 할 줄을 몰라서 하지 못 한다.

반면에 성공하지 못 하고 실패할 일도 몰라서 예방하지 못 하고, 그게 오히려 성공할 일 이기나 한 것 처럼 착각되어 행해지니 성공은 커녕 어찌 실패를 피하리오.

 

깨닫기에는 언제나 그 순간이(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깨닫는 것도  -깨닫지 못 하는 것에 비하면-  하나의 늦지 않은 깨달음이다.

하물며 타인으로 부터의 말 이나 글을 통하여 깨닫는 계기를 삼는다면 그 얼마나 현명한 정신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