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현자는 행복하지 않고, 바보는 불행한다.

나 아닌 내 2006. 11. 11. 02:25

사람이 뭔가를 대상으로 하여 만족이나 불만을 느끼는 것은 제 마음에서 이루어 진 비교적 평가(意, 의미라 하겠음) 이외의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평가를 하려면 뭔가(대상)를 뭔가(기준)와 비교해야만 가능하다.
고로 비교할 기준이 없이는 비교할 대상도 있을 수 없는 것 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비교의 기준이 되고, 무엇이 비교의 대상이 될까?
 
그건 각 자의 마음에서 정해 져 일어 난다.
예컨대 배우자(남편이건, 아내이건)가 좋으냐, 나쁘냐고 평가하려면 배우자의 어떤 점을 하나 특정하여 대상화 해 놓고, 그 점이 없는 것(假定)을 기준으로 비교하고,
배우자가 좋은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고 평가하려면 배우자 자체에 관한 자기의 의식을 대상으로 하여 특정의 누군가나, 통상적인 사람(경험을 종합한 假定)이나, 이상적인 사람(假定)을 기준으로 의식화 하여 비교한 다음에 그 결과에 따라서 평가가 이루어 진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있는 그대로] 있을 뿐, 비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있는 그대로] 있을 뿐, 평가의 기준이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가치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비교, 평가, 가치도 비교하고, 평가하여, 가치를 형성하는 사람의 두뇌에서 이루어 지는 작업(?)이고 결과일 뿐, 그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비교, 평가, 가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도 잘못이다.
그걸 두뇌 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으니까.
 
비교, 평가, 가치가 사람의 두뇌 외부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말도 잘못이다.
사람의 두뇌 바깥에 있는 것은 비교적으로도, 평가적으로도, 가치적으로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대한 환상의 세계가 펼쳐지는 원인이 발견된다.
바로 의미적 투사, 그 결과로서의 의미적 반영이라는 현상이다.
 
예컨대 누군가의 어떤 글을 오직 글 그대로만 보면 좋은 글도, 나쁜 글도 아닌 그냥 그 글로 있을 뿐 이다.
누군가가(그 필자이건, 다른 독자이건) 그 글을 보면서(보고 나서 포함) '이런 글이 없는 상태'라는 가정과 비교하거나 '다른 누군가의 글'과 비교하거나 ' 이 글로 인하여 발생할 결과'와 비교하여 평가를 하게 되면 '이 글은 좋은(또는 나쁜) 글 이다'거나 '이런 글은 없는(또는 있는) 게 낫다'거나 하는 등등의 평가가 발생하고, 그 평가에다 부가하는 가중치(대단하다, 또는 하챦다는 등)에 따라서 가치가 매겨진다. 
 
있는 그대로만 보면 만족도, 불만도 발생하지 않는데 보는 사람의 두뇌에서 비교적으로 평가된 가치가 투사되어(마치 가치대로) 보기 때문에, 보는 그 사람의 두뇌 속 의미나 가치가 투영되어(마치 가치대로) 보이는 환상적 착각이 발생하는 것 이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도 그 상황을 보는 사람의 두뇌에 비교, 평가, 가치로 이루어 진 의미(意)라는 인분(因分-좋으니, 나쁘니 하는 의미)이 없으면, 그 어떤 상황도 연분(緣分-좋은 조건이니, 나쁜 조건이니 하는)이 되지 않는다.
그럴 때 사람들은 '연분이 없어서....'라 하지만, 뜻 대로 정확하게 말 하자면 '인분이 없으니....(연분이 생길리 없지)) 해야 한다.
 
사람이 -육체적 고통이나 그 해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행복(기쁨)을 느끼거나 불행(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모두가 거대한 의미적 환상놀음인 것 이다.
옛 선사들은 이걸 진작 깨달아서 '있는 그대로 보라'고 했지만, 그 뜻을 자세히 가르쳐 주지 않았거나, 듣는 사람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하기사 머리 속에만 있는 것도 있는 그대로이긴 하니까...
그렇지만 머리 속에만 있는 것 이라고 알지 못 하면, 머리 바깥에 실제로 있는 것 처럼 착각(동일시) 된다는 것은 몰랐겠지.
마치, 영화를 영화라고(현실이 아니라고) 알지 못 하고 보면 꼭 현실처럼 동일시(착각)되는 것 처럼.
 
이상과 같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구조의 근본을 제대로 파악한 (현명한) 사람은 행복을 짓거나 않거나, 불행을 짓거나 않거나, 그런 걸 놀이처럼 가볍게 하거나 아예 하지 않거나를 자유자재로 선택하고, 선택을 수정하거나 포기도 할 수가 있다.
 
그 다음으로 현명한 사람이라면 행복은 만들어서 누리고, 타인에게도 그러자고 권유하리라.
 
그렇지만, 행복과 불행이 제 두뇌 외부에 있는 누군가 사람이나 상황에서, 그 때문에 발생하는 것 이라고 환상적 동일시(착각)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사람은, 그 어떤 현실에서도 그 보다 나은 것과 비교하여(나은 것을 탐하여) 현실에다 불행의 의미를 투사하여, 제 마음의 불행이 투사된 현실을 실제 그대로의 현실이라고 악을 쓰지만, 그렇게 악을 쓴다고 근본에서 불행병이 고질화 된 사람이 어찌 행복해 지리오....
 
어리석은 자는 이루어 지지 않거나, 이루어 지기가 불가능 할 정도에 가깝게 어렵거나, 조달 불가능할 정도로 비용이 많이 들거나, 부작용과 역효과가 빈발하는 가정(假定)의 세계를 행복이라고 탐하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한다는 것을 모른다.
그래서 어리석다는 것 이지만...........
 
현명한 사람은 소위 '헛 똑똑이'의 어리석음을 알기에 그걸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타인을 충고할지언정, 스스로 무모한 행복을 (탐)하지 않는다.
그게 바로 불행임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