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의식이라고 하자.
식(識)이란 5관으로 접촉하여 두뇌에 입력된 색성향미촉의 다섯 가지(前5識)가 기본이다.
이걸 언어로 변환한 것이 제6식이라는 어식(語識, 이 것도 의식이라고 적어 놓은 책도 있더라)
위의 여섯 가지가 그대로 기억되어 있는가 하면, 그 것 에서 파생되는 것이 상상의 식(識)이다.
지금의 얼굴을 보면서 30년 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거나, 지금의 얼굴을 보면서 20년 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거나, 눈 앞의 뭔가가 없어 졌다고 상상해 본다거나, 언젠가 뭔가가 있게 되었다고 상상해 본다거나 하는 것 들이 상상의 식 이다.
식(識)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한정되는 형식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어서, 단위로 두뇌 속에 있다.
비유하자면, 필름에 하나, 하나의 모습이 찍히는 것 처럼.
한 순간이라는 시간적 한정이 없이는, 그리고 일정한 한계라는 공간적 한정이 없이는 하나의 단위 식(개별적인 識)이 만들어 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하나의 식(識)은 딴 식(識)과 사실적으로 비교되기도 하고, 가치적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사실적 비교의 결과는 무게, 길이, 시간, 높이, 깊이 등등으로 어느 것이, 어느 것에 비 하여 (예컨대) 더 무겁다는 형식이 되고, 가치적 평가의 결과는 어느 것이, 어느 것에 비하여 좋다(나쁘다), 소중하다(하챦다), 비싸다(싸다)는 등의 형식이 된다.
이런 비교와 평가의 결과를 의미라 하고, 마음 중의 식(識)과 다른 의(意)의 차원이다.
식과 의의 두 가지를 합하여 의식이라고 하고.
그런데 모든 식(識)에 의(意)가 부가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의(意)가 부가된 의식도 경우에 따라서는 의(意)를 동반하지 않고 떠 오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마음을 항상 의식이라고 -意와 識이 함께라고- 아는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이런 비교와 평가(意 형성)의 과정이나 결과를, 그 사람의 정신이 제대로 아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정신) 스스로 비교와 평가 작업을 직접 하면서 아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어째서, 어떤 식(識)에 좋다거나 나쁘다(싫다)는 의미(意)가 붙어 있는지를 모르는 채, 그 식(識)으로 상징되는 사물이나 현상 자체가 좋거나 나쁘다고 알게(사실은 착각이다) 된다.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인 사람이나 사물, 현상에 대한(관한) 이미지(識)나, 그와 상당히 유사한 이미지(識)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의미(意)가 붙어 있어서, 그 의식이 외부의 대상과 겹쳐지는 순간에 투사, 투영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타향 사람보다는 고향 사람이 좋아"하는 의식이 형성되어 있다가, 고향 사람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에 내면의 의식이, 지금 만나는 사람에 대한 의식에 겹치기로 투사, 투영되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는 것 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뭔가를 좋다고(좋아) 하느냐, 나쁘다고(싫어) 하느야에 관한 체계적 분석이다.
어쨌거나 사람의 마음에 좋다거나 나쁘다는 의미가 붙은 식(識)이 있으면, 그 의미가 소위 좋아, 또는 싫어라고 말을 하게 되고 그 말의 느낌(맛)이 의미(意의 味)이다.
의미의 맛에 따라서 좋은 맛(好意味)이 나는 것은 그대로 유지하거나, 새로 가지려는 욕망이 생기고, 나쁜 맛(惡意味)이 나는 것은 버리거나, 멀리 떨어지거나, 고치려는 욕망이 생기니 그게 의욕(意慾)이다.
의욕은 실행, 실현하려는 충동을 일으키니 곧 의지(意志)이다.
이상으로 마음 속의 어떤 식(識), 그 것이 눈 앞에 있거나 없거나 간에, 그 것에 어떤 의미(意)가 부가되는 순간 부터 그 사람의 마음에선 그걸 실행, 실현해야 하는 책임과 부담이 발생한다.
아무리 좋은 의미도, 그 사람에겐 그걸 실행하여 실현할 책임으로 변하고, 그 것이 실행 장애에 빠지면 답답하고 괴롭고, 실행하고도 제대로 실현되지 않으면 불만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된다.
나쁜 의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도, 사람들이 제 마음 속의 의미라는 것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해 보려는 시도조차 안(못?) 하고, 그 의미라는 것에 빠져서 그게 저 자신인 줄 착각하여, 부담하지 않아도 될 책임과 고뇌, 고통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는 커녕, 알아 보려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여기까지 제대로 이해하고 확인해 본 사람이라면 이 글의 제목인 [좋아와 나빠(싫어)의 사이를 넓히기}가 무엇을 뜻 하며, 그 일을 누가, 왜 해야 하는지도 대충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좋아와 나빠는 그 것들 끼리는 모순적이면서 필수적인 상대이다.
모순적이라 함은, 좋아이면 나빠일 수가 없고, 나빠이면 좋아일 수가 없다는 뜻 이다.(그렇쟎은가?)
필수적이라 함은, 상대가 나빠이어야만 이 쪽이 좋아일 수가 있고, 이 쪽이 나빠이어야만 상대가 좋아일 수가 있다는 뜻 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것은 좋아와 나빠가 필연관게, 모순관계라는 것 뿐 인것 같다.
그래서 필연관계니 좋아나, 나빠(싫어)를 벗어 날 수가 없고, 모순관계니 좋아아니면 나빠이고, 나빠 아니면 좋아라고만 안다.
그렇게 알다 보니 좋아와 나빠(싫어) 사인에 틈새(間)는 거의 없는 것 처럼 알게 되고 만다.
그런데 실제로는 좋아와 나빠의 사이(틈새)는, 넓히려고만 하면 엄청나게 넓힐 수 있다.
틈새를 넓히려 하지 않으면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그럴까?
상대적인 의미 자체가 두뇌 외부에 있는 공간이니, 틈새니 하는 것 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오직 그게 형성되어 있는 사람의 두뇌 속 에서 일어 난 비교와 평가라는 비현실적 산물(?)일 뿐 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 하자면, 무엇을 무엇과 비교하여 평가하면 상대적인 의미가 이쪽과 저쪽에 붙지만, 그런 비교와 평가를 하지 않으면 어느 한쪽에도 의미가 붙지 않으니 틈새라는 말 자체가 우습지 아니한가....
예컨대, 갑녀가 을, 병, 정의 두 남자를 배우자깜으로 비교하여 평가하여, 그 중의 하나에는 좋아(好意), 다른 둘 에는 악의(惡意)가 붙는다고 가정하자.
그렇게 되면 호의와 오의의 사이엔 추호의 틈새도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을, 병을 비교하여 평가한 결과 [을남]에게는 좋아(好意)를 붙일만 하다고 붙이고, [병남]에게는 나빠(惡意)를 붙일만 하다고 붙였지만, [정남]에게는 별로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무의미한- 평가가 나오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 무의미는, 통상적인 무의미하다는 판단과 다르다)
바로 좋아와 나빠의 사이가 만들어 지는, 그게 발견되는 사례이다.
사람이 뭔가를 뭔가와 비교하여 평가하면 반드시 필연적, 모순관계적 의미(意)만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반드시 그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어떤 비교와 평가 보다도, 그런 비교와 평가의 목적(예 : 자기와 타인들의 조화로운 잘 살기)이 본원적으로 중요한 것 이기 때문이다.
비교와 평가의 결과가 어떠하냐 보다도, 그 이전에 누구(주체)의 무엇(조화로운 삶)을 위해서 어떤 비교와 평가가 필요하냐가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 이다.
이걸 모르면 몰 주체적, 맹목적인 비교와 평가에, 그 것도 조금의 여유도 없는 함정에 빠져서 주체들을 시련과 역경에 빠트리게 된다.
자, 여기서 좋아와 나빠의 사이를 넓힐 담당자가 누구냐(무엇이냐)를 밝힐 차례이다.
단적으로, 나 자신이다.
내 마음의 일(의미형성)이니, 내 마음을 다룰 책임이 있는, 내 주인의 하인인 내 책임일 수 밖에.
고로, 내가 의미형성의 여유를 많이 확보할 수록 내가 자유롭고 편하면서, 주인과 주변의 타인에게도 도움이 될지언정 결코 해를 끼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좋아와 나빠의 사이를 넓히는, 즉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는 무의미가 적용될 범위를 넓히는 방법에 관하여 밝힐 차례이다.
두뇌에서 비교나 평가 작업이 발생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그 목적적 필요성 여부부터 확인한다.
그래서 불필요한 비교나 평가를 하지 않으면 책임과 부담의 공간이 그만큼 넓어질 수 밖에.
불필요 하다는 근거는 무엇으로 삼을 것 인가?
첫째는 자기나 타인의 삶과 관련하여 그 것을 좋다하거나, 나쁘다 할 필요가 어디에도 없다는 경우이다. (이 것만 줄여도 엄청난 자유와 행복을 느끼리라.)
둘째는 자기나 타인의 삶에 필요할 것 같지만, 그 것에 (좋아하거나 싫다해 본들)사실적으로 변화될 가망이 전혀 없는 경우이다.
예컨대, 오랜 가믐에 구름이 몰려 와서 비가 내리면 좋겠다는 의미의 경우이다.
셋째는 하고 싶고, 되기를 바란다 해도, 자신이 그 일을 스스로 할 수가 없는 경우이다.
예컨대, 비는 언젠가는 내리겠지만, 당장 내가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경우이다.
넷째는 필요성, 객관적 가망성, 주관적 가능성이 있어도 그걸 실행하는데 투입될 시간, 노력, 비용등에 비하여 발생할 효과(부정적인 역효과도 포함하여)가 적은(낮은) 경우이다.
차라리 가만히 있으니만도 못 하다는 경우이다.
예컨대, 굿을 하거나, 기우제를 지내는 경우이다.
이상 네 가지의 경우만 제외하면 대부분(전부라 하긴 어렵겠지만)의 의미는 필요하고, 건설적이고, 생산적이고, 타인이나 사회에도 해로운 것이 될 것 이다.
반대로 말 하자면, 이상 네 가지에 해당되는 의미의 역기능(부정적 작용)을 제대로 알지 못 하여 그걸 사전이나, 도중이나, 사후에라도 고치거나 폐기하지 않으면 그 해악이 결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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