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따라서는,
어떤 사실이 있느냐, 있었느냐, 있을 것이냐를 중시하는 성격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실을 좋다고 여기느냐, 나쁘다고 여기느냐가 중시되는 성격이 있기도 하다.
전자(사실지향)를 사실위주의, 이성적인 냉철한 성격이라고 부른다면,
후자(의미지향)를 의미위주의, 감정적인 흥분적 성격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가지 성격을 극단적으로 대비하여 예를 든다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없는 것은 좋다고 할 필요가 없다"(사실지향)고 하는데,
"있건, 없건 좋은 건 좋은거야"(의미지향) 한다.
또 "살아 있어야 좋고, 나쁘고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사실지향)고 하는데,
"의미가 없거나, 나쁜 의미의 삶은 차라리 없는게 낫다"(의미지향) 한다.
사실지향의 성격에서는 살아야 해, 흥해야 해,사고를 막아야 해 같은 말이 자주 나오는 반면에,
의미지향의 성격에서는 죽어도 좋아, 망해도 좋아, 사고가 나도 어쩔 수 없어 같은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전히 사실지향이기만 하지도 않고, 완전히 의미지향이기만 하지도 않다.
사실지향이면서 의미지향이고 의미지향이면서 사실지향이기도 하다.
단지, 어느 쪽이 대체로 좀더 농후하냐(우세한 경향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이다.
허나, 그 차이라는 것의 폭이 워낙 넓으니.......
어쨌거나 사람은 누구나 사실의 차원에서 삶에 필요와 불필요를 구별해서 선택하면서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런데 사실의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좋고, 나쁘고를 구별하는 것 이지, 좋고 나쁘고를 구별하여 사실의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좋은)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선택한다"는 성격(의미지향)과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수 있겠금 사실을 갖추기 위해서 선택한다"는 성격(사실지향)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더 고개가 돌아가느냐의 차이는 그 개인과 주변 사람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단순한 사실의 세계에 아무 선택의 여지가 없이 사는 것 이라면 아무 의미도 필요없다.
스스로 선택하지 못 하는데 좋아하면 뭘 하고, 나쁘다 하면 뭣에 쓰게?
자기를 학대하고 괴롭히는데 쓰게?
사실을 어떻게 파악하고 대처할 것 이냐에 관하여 선택의 폭이 넓으면 넓을 수록, 그 폭을 넓히면 넓힐 수록 삶에 필요여부, 이해(利害) 여부를 올바르게 구별하는 일의 중요성이 커 진다.
그러니 사실지향도, 의미지향도 모두가 필요하고 유익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문제는 어떨 때, 어느 것이 우선이고, 근본이어야 하는가 여하이다.
어느 것이 그 다음이어야 하는가 여하이다.
무엇이 있는(있었는, 있을)가?
현상파악 부터 필요한 이 때는 순수한 사실지향이 우선이다.
어떤 것을 찾아야 할 것 인가?
자기의 삶에 필요한 것을 고를 때는 순수한 의미지향이 우선이다.
찾기를 그치고, 무엇을 선택할 것 인가?
실제로 고를 때는 가능성, 효용성을 고려한 순수한 사실지향이 우선이다.
이걸 제대로 구별하여 행하지 못 하면 사실적 파악도, 의미적 선택에도 장애가 발생하기 쉽다.
무엇이 있는가, 있을 것 인가를 알아야 할 때에 의미적으로 나서면 사실파악에 지장이 생기지 않기 어렵다.
무엇이, 언제, 얼마나 자기의 삶에 필요하고 유익한지 여하를 알아야 할 때에 사실적으로 나서면 필요 유무와 정도를 파악함에 지장이 생기지 않기 어렵다.
때문에, 아무 때나 사실지향으로만 접근하려 들거나, 아무 때나 의지향으로 접근하려 들거나 하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사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거나 역효과 위험이 농후한 일을 "좋다"는 의미에 사로잡혀 집착하거나, 가능할 뿐만 아니라 긍정적 효과가 적지 않을 것이 충분히 예견되는 일을 "나쁘다(싫다)"는 의미에 사로잡혀 외면, 회피하는 일은 사실지향의 성격으로 통제하여야 한다.
또, 가능하고 효과가 크게 발생하리란 예상으로 실제의 의미를 따져 보지도 않은채 사업확장, 소득확대에 매진하는 것 또한 그 인생에 도움보다는 해가 되기 쉽다.
사실을 파악해야 할 때는 사실지향으로, 삶에 필요와 이해를 파악해야 할 때는 의미지향으로 하되, 이 두가지 기능을 적절히 조화롭게 활용하는 지혜를 키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