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사랑이 뭐길래 그리도......"한다.
마치 사랑이라는 것이 누구라도 감각적으로 확인이 가능한 욋적인 것 으로 있지만, 그걸 제대로 발견해서 알차차리지 못 하기나 하는 것 처럼.
나는 그와 다르게(반대로) "무얼 사랑이라고 (말) 하는데?" 하고 묻기 부터 하련다.
위의 두 가지는 그 뜻이 -상반될 정도로- 매우 다르다.
전자는 사랑이라고 칭하는 것이 외부에 있다는 뉴앙스가 강한 반면에,
후자는 "사랑"이라는 말로 무엇을 지칭하느냐(지칭하는 그 것의 정체가 뭐냐)에 관하여 전혀 모른다는 뜻이 강하다.
전자의 편 에서는 "사랑이란........" 하는 대답이 나오지만,
후자의 편 에서는 "사랑이란 말이 무얼 지칭하는 것 이지?" 하고 반문하거나 탐구적인 반응이 나온다.
어떤 이는 "사랑은 주는 거야" 하는 가 하면 "사랑은 받는거야" 하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 하는 가 하면, "사랑은 행복의 씨앗이야" 하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사랑은 상대를 돕는거야" 하는 가 하면, "사랑은 상대로 부터 사랑한다는 대접을 받는거야" 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사랑하기 때문에 괴롭다" 하는 가 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하는 이도 있다.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무엇(어떤 것)을 주는 것, 받는 것 이라느니,
왜 즐겁거나 행복하다는 것 인지에 관한 알맹이가 없다.
그러니 "사랑은 사랑이야" 하는 말을 형식만 조금씩 바꾼 것에 불과하다.
그 어떤 대답에서도 "(구체적으로)이러 저러한 것" 이라고 적시하면서, 그걸 사랑이라고 한다는 식의 대답은 없다.
어느 정도 구체적인 적시를 하는 대답도, 사람마다 이렇궁 저렇궁으로 다양하니, 과연 무엇을 사랑이라고 말 하는지 명백하지도, 확실하지도 않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으며, 그걸 해소하는 방책은 무엇일까?
언어에는 기본적으로 서술어와 의미어의 두 가지가 있다.
감각적으로 접촉이 가능한 사실을, 감각적으로 접촉한 경험대로 설명하는 것이 서술어이고,
현재의 이 사실과 저 사실을, 현재의 사실과 기억된 사실을, 현재의 사실과 가정(假定)의 사실을, 기억과 가상을 비교하여 그 중의 어느 것이 (예컨대) "많아서 좋다(낫다)"고 하게 되면 그 상대편은 "적어서 나쁘다(못 하다)" 하는 평판이 붙으니 이게 비평이고, 통상 의미나 가치라 하기도 한다.
의식(意識)중의 식(識-색성향미촉어)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서술어이고,
의(意)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비평어, 가치판단어(통상 의미라 함) 이다.
예컨대, 홍길동이는 키가 크고 음성이 아름다워서(여기까진 識語) 좋게 여긴다(이게 意語)
그렇다면 사랑(愛)이라는 언어는 서술어인가, 의미어인가?
이걸 밝히기 전에 서술어에 해당되는 언어는 그 로서 지칭하는 것의 진위를 외부에서 증명할 수 있었거나, 있거나, 있을 것 이지만, 의미어에 해당되는 언어는 그게 불가능하다.
오직 그걸 표현하는 사람의 두뇌 속에서 형성되는 것 이기 때문에, 그걸 제대로 표현하기 전 에는 누구도 확인이 불가능하고, 또 본인(그의 정신)조차도 어떤 식과 식의 비교와 평가로 나온 것 인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컨대) 퇴근해 온 사람이 가족을 상대로 평소라면 별 반응이 없었던 일에 강한 분노를 발산하고 있을 때, 그 본인이 아는 원인이 과연 전부이고, 진실할까?)
"사랑"이 서술어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칭하는 내용이 거의 일치할 정도로 비슷해야 한다.
그래야 "그래, 그걸 사랑이라고 하지" 하고 의사가 통할 수 있으니까.
"사랑"이 의미어라면 사람마다 사랑이라고 말 하는 내용이 다른 것이 정상이다.
왜냐하면, 그건 무엇을 무엇과 비교, 평가하여 사랑이라고 하는지가 각 자의 두뇌 속에 따로(개별적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인 각색의 대답이 나오게 되는 것 이다.
결국 이상의 과정을 통하여 "사랑"이라는 말은 각 자의 두뇌 속에 어떤 이미지(識)에 붙어 있는 것 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동일한 이미지를 가지기로 하지 않는 한 그 내용이 각양 각색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언어적 혼란은- 그 해소책도 단순하게 드러난다.
서로의 대화를 통하여 "무엇(어떤 것)을 사랑이라고 하자"고 합의가 되면 그 범위에서는 -타인이야 뭐라고 하던- 그걸 사랑이라 하고, 합의가 되지 않고 서로 다른 것을 사랑이라고 고집한다면, 서로가 그 것을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그렇더라도 합리적, 합목적적으로 "어떤 것(무엇)을 사랑이라고 할까?"에 관하여 현명한 사람들이 그 근본모형(?)을 만들어 제시할 필요는 크다고 본다.
이하, 내 나름의 모델을 하나 제시해 보련다.
사랑은 "자기의 삶을 안전, 조화, 순탄하게 돕는 말과 행동" 이라고.
여기에 포함되면 무엇이나 사랑이고, 여기에 포함되지 않으면 무엇도 사랑이 아니라고.
자기는 좁은 개념이 아니다.
확장적으로 보자면 이웃은 물론, 사회, 국민, 인류, 나아가 자연, 우주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자기에 포함된다.(결국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좁혀서 보자면 세포 단위 이하 극미의 입자도 포함되니, 버릴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삶이란 유기체가 자연스럽게 탄생, 성장, 생활, 변화, 소멸해 가는 과정이다.
그걸 인위적으로 훼방하지 않고, 본성 그대로 살도록 돕는 것이 사랑이다.
내가 갖느니, 내가 주느니 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 아니라, 그로써 자기와 상대의 삶에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이 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니 되지도 않을 대상을 향하여 사랑한다느니, 사랑하기 때문에 괴롭다느니 하면서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반대이다.
위에서 예시한(진정한?) 사랑이라면 누구도 괴롭거나, 아프거나, 삶에 해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랑하기 때문에 아프다, 괴롭다는 일은 일어 날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괴롭다"(즐겁다도 마찬가지 이지만) 하기 이전에 (나중이라도 가급적 빨리) "내 마음에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사랑이란 것 인가?" 하고 진지하게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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