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을 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차치하자.
담배를 피우는 것이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그 사람을 본다.
(그 후에) 그 사람이 담배 피우는 것을 자주 본다.
또 그 후에 담배를 끊었다고 하면서 피우지 않는 그 사람을 본다.
내가 본 것은 그 사람의 몸, 그 중에서도 주로 입과 코 이다.
그 몸에 담배 피우는 현상이 보이면 "저 사람은 담배를 피운다"고 알고,
그러다가 "담배를 끊었다"고 하면서 담배 피우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으면 "저 사람은 담배를 끊었다"고 안다.
자, 그 사람의 무엇이 피우지 않던 담배를 피우는가?
피우던 담배를 끊었는가?
내게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의 입인 것 같기도 하고, 손인 것 같기도 하고, 코인 것 같기도 하고, 기도(氣道)인 것 같기도 하고, 폐나 위장이 담배를 피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담배를 끊는 것도 그런 것이 하는걸까?
사람들은 남 에게 담배를 피우라 하기도 하고, 피우지 말라거나 끊어라 하기도 한다.
또, 스스로 담배를 피우겠다 하기도 하고, 안 피우겠다 하기도 하고, 피우던 담배를 끊겠다 하기도 한다.
그렇게 말 하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의 무엇일까?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다가 끊으려고 애 쓰고 있거나, 애 쓰다가 실패하고 계속 피우거나, 끊은 사람도 있다.
도대체, 담배를 피우는 것은 그 사람의 무엇이고, 끊으려고 애 쓰는 것은 그 사람의 무엇일까?
사람이 뭔가를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일은 다음과 같은 심리적 과정을 거쳐서 결정된다.
하나의 단위 행위(어떤 말 이나, 어떤 행동)가 두뇌 속에 정보(識)로 형성된다.
타인의 담배 피우는 모습이 보인 것도 하나의 정보(眼識-色과 像)이고, 담배를 피우면 이러 저러한 점이 좋다, 또는 나쁘다(해롭다)고 한 타인의 말이 들린 것도 하나의 정보(耳識, 語識)이다.
그 정보가 지금의 상태(아직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와 비교되어 어느 것이 낫다, 어느 것이 낫지 않다고 평가되는 것이 의미이고, 가치평가인 바 이게 그 정보(識)와 맺어지면 하나의 의식(意識)이 된다.
담배를 피우는 것(識)이 "보기에도 근사하고 심신의 안정에도 좋다"(意)는 것 이나,
담배를 처음부터 피우지 않거나 끊어서 피우지 않는 것(識)이 "자기 건강상, 경제상, 타인에게도 좋다"(意)는 것이 바로 그런 의식이다.
이와 같은 하나의 의식은 그 당시에 가지고 있던 정보(識)와, 그 순간에 새로 획득하거나 생산하는 정보만이 자료가 되어서 비교와 평가의 기준이나 대상이 될 뿐 이다.
단적으로, 더 많은 시간 동안 이러 저리 많은 생각을 해 보느냐,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타인의 조언이나 충고를 접하느냐에 따라서 평가의 자료,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결론 또한 그렇게 정해 지기 마련이다.
간단히 말 하자면 담배 골초들과 자주 접촉하는 사람의 두뇌엔 담배를 피우는 것이 좋다는 의식이 형성되기 쉽고, 금연자나 단연자들과 주로 생활하는 사람의 두뇌엔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 좋다는 의식이 형성되기 쉽다.
다만 소위 선입견, 고정관념이니 하는 것의 소유자는 예외로 하고.
담배 피우기를 시작하지 않느냐, 담배를 피우느냐, 피우던 담배를 끊느냐 여하는 1차적으로, 그 사람의 두뇌에 형성되는 "흡연(금연, 단연)에 연결된 의미"(즉 흡연의식, 금연의식, 단연의식)에 달려 있다.
담배피우기(識)에 좋다는 의미(好意)가 연결된 것이 애연(가) 의식이고, 나쁘다는 의미(惡意)가 연결된 것이 혐연(嫌煙)의식인바, 이 의미가 바로 욕망(意慾)을 일으키는 씨앗이다.
의미가 강화되면 의욕(意慾)으로, 의욕이 강화되면 의지(意志)적 충동(에너지 활동)을 일으킨다.
어쨌거나 의지를 남으로 부터 억압 당한다는 것도 참기 어려운 일 인데, 그걸 스스로 억압히기란 여간이 아니다.
남의 통제나 처벌이 두려워서 담배를 피우지 않기도 어려운데, 제 스스로 그걸 끊으려고 참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 이랴.
여기까지가 담배를 피우게 되는 심리적 과정이고, 그 것이 습성으로 고착된 것이 흡연 중독이다.
이 정도는 누구라도 이해하기 쉽다.
문제는, 이런 정도조차 이해하지 못 하는 사람이 남의 흡연습성을 간섭하거나, 고치려 하거나, 스스로 고치려 하는 일의 무모함에 있다.
비유하자면, 병의 원인조차 모르는 환자 자신이 남 이나 자기의 병을 판단하고 다루려는 것과 같다.
담배를 피우려는 의식이나, 담배를 끊으려는 의식이나 하나의 의식이지 그 이상도, 이외도 아니다.
그 사람의 주인(생명)도 아니고, 순수한 나 (맑은 정신)도 아니고, 몸의 어떤 부분도 아니다.
그러니 담배를 끊기 위하여 생명을 끊으려 하거나, 정신을 잃게 하려거나, 무조건 참으려다가 안 되면 몸의 특정 부분을 공격하거나, 담배나 재털이등을 감추거나 부수거나 하는 등의 그 어떤 시도도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오직 나(맑은 정신)의 상태부터 먼저 순수함에 머물러야 한다.
나 아닌 그 무엇과도 초월적으로 잠시 홀로여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먼저 "왜 담배를 피워야만 하는가?", 그 이유와 목적(흡연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지향하는 목표)을 자꾸, 자꾸 캐 물어야 한다.
"아하, 그래서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었구나.." 하고 이해되도록 까지.
그런 다음에, 마찬가지로 "왜 담배를 끊어야 하는가?", 그 이유와 목적(단연, 금연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실현코자 하는 결과적 목표)을 자꾸, 자꾸 캐 물어야만 한다.
"아하, 그러니 담배를 한 방에 끊어야 하겠구나.." 하고 당장 실행하려는 충동이 발현하기 까지.
여기까지 읽으시면 사람들의 금연(斷煙)시도가 성공하기 어렵고 실패하기 쉬운 원인이 대충 짐작되리라.
왜 지금과 같은 고질상태에 이르기 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을 수 없었는지 그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채로, 엄연히 의식계에 중대한 의미로 무장된 흡연의미(의식)가 어찌 약화, 무화되기나 한다고....
또, 왜 흡연에 어떤 문젯점과 부작용이 있어서 그걸 해소해야 하고, 단연에 어떤 유익함이 있어서 그걸 실현함이 마땅한지에 관한 의식적 정립과 토대 강화도 없이 강한 단연의지가 생겨나기나 한다고....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병을 치료하려면 첫째(먼저), 병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그 원인을 해소할 수가 있고,
둘째(다음에),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발생하는 해로움과 치료하면 발생할 이로움을 제대로 파악해야 치료할 의미(의견, 의욕, 의지)가 생기는 것 처럼.
흡연을 하나의 병 이라고 가정하면 지금의 상태에 이를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을 원인으로 인정해야 하고, 그 다음에 흡연의 폐해(대기 오염, 호흡기에 장애, 악취, 자기와 주변 사람의 건강을 해침, 대소 화재사고, 경제적 낭비, 2세에게 선천적 가해(?) 등등)를 가능한 모두를, 최대한으로 나열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단연의 목적(흡연 폐해를 해소하고, 그걸 본래의 이로운 방향으로 회복함)을 구체적으로, 자세히, 크게 적어서 두뇌에 강하게 기억해 넣어야 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흡연이나 단연, 금연의 주체는 생명체 자체가 아니고, 생명체의 정신 기능도 아니고, 오직 생명체 내부의 한개 의식(그 중에서도 그 의식의 意 부분)일 뿐 이다.
이 두가지 의식을, 생명체(진정한 주인)의 삶에 유익(또는 유해)하냐 여하를 점검, 확인하여 판단하는 것이 바로 (그대의) 나 이다.
단적으로 나 가(정신이) 흡연의식을 반대하지 않거나 지지하거나 하면 흡연이 발생하고,
단연의식을 반대하지 않거나 지지하면 단연이 발생하고,
흡연의식과 단연의식이 교대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그대로 두거나 쩔쩔매기만 하면 괴상한 흡연(단연포기?)과 단연(흡연포기?) 이 갈등적으로 발생하고......
나는 단연을 시작함에 있어서 담배를 저대하긴 커녕, 아예 상대로도 여기지 않았다.
단지 내 마음 속의 담배라는 이미지(識)에 붙은 의미(意)도 대결의 상대가 아니라, 그저 확인과 평가의 대상으로 삼았을 뿐 이다.
그 결과, 30년을 넘게 피워 온 이유나 목적에 붙은 의미야 실로 대단한 것 같았는데, 지금에 와서는 백해무익이라는 것 으로만 확인되었다.
그걸 진작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시도했던 몇 번의 단연 시도가 실패할 수 밖에 없었지....
3년이 지난 지금에는 단연을 통하여 느끼는 보람 또한 크다.
주변에서 존경을 포함하여 호의를 전해 주는 등등도 있지만,
흡연에 지출하던 비용(지금은 연간 200만원 상회하겠지)을 절약하여 해외 여행도 할 수 있겠다는 것 하나만 특별히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