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언가(특정)를 앎을 그 정도에 따라서 세 가지로 구별할 수 있겠다.
1). 그 무엇(특정)을 모르는지조차 전혀 모름을 [모름]이라고 표기하자.
2). "그 것(특정)을 모른다"고 앎(知)을 "모른다고 앎"(無知의 知, 智)이라
고 표기하자.
3). 모르는다고 아는 것이 전혀 없음을 [다 안다고 앎] 이라 하고.
예컨대, "이 글을 만들고 있는 [내](특정)가 어디에 있는 무엇인지 모른다
고 앎"을 무지(無知)의 지(知)라 하여,
[내] 스스로는 물론이고, 그걸 모른다는 것 조차 전혀 [모름]과 구별한다.
또, 나름대로 다 안다는 [앎]이 있는 바, 이상 셋을 순차적으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아진다.
[모름] -> "모른다고 앎" -> [앎] .
대체로 [모름]은 [무의식(無意識)]이라서 [내]가 전혀 모르기 때문이고,
"모른다고 앎"은 "일부 의식(一部意識)"이라서 [내]가 일부만 알기 때문이고,
[안다고 앎]은 "전부의식(全部意識)"으로 여겨져서 [내]가 그리 알기
때문이다.
이상 -[모름], "모른다고 앎", [안다고 앎] 세 가지 모두가,
두뇌 속에 있는 [내]와, 두뇌 속에 저장, 현현해 있는 의식(意識)과의 관계
에서 파생되는 현상일 뿐, 두뇌 바깥에 실재(實在) 그대로와는 전혀 무관
하다.
예컨대, 뒷 동산 정상에 있는 [소나무](實在한다 가정)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 소나무](實在)에 관한 의식이 이 두뇌 속에 전혀 없으면(無意識),
그걸 모르는 줄도 모르는 [모름]이고,
그 산 정상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소리(남의 말)만 들었을 뿐(一部意識)
이고 더 이상은 모른다고 알면 "모른다고 앎"이고,
[내]가 스스로 몸을 움직여 그 산 정상에 올라서 눈, 귀, 코, 혀, 손 오관
(五官)으로 정보(識)를 획득하고, 그 정보를 자료로 하여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적인 언어(意)를 만들어서 그 정보에 연결하여(意識化) 놓고,
그 것(意識)에 부족이나 틀림이 없다고 알면 소위 [(제대로) 다 안다고 앎]
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자세히 접촉하여 정보를 획득해도, 그 것은 감각기관을
매개로 하여 획득된 두뇌 속 정보일 뿐, [실재] 하는 그대로와는 양적으로
터무니 없이 부족하고 질적으론 전혀 무관하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터럭만큼의 의문이나 관심도 없는 이런 문제를
왜 제기하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이 답해 주리라.
사람(그 주인)이 그 속에 [내](정신)를 만들어 놓고 왜(누구의 무엇에
쓰려고) 아는 일을 하겠금 하고 있을까, 단적으로 [제 잘 살기] 위해서다.
자기가 잘 사는데 필요한 것을 양적으로 가급적 부족함 없이,
질적으로 정확하게 알아야만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본분이다.
그러자면 가장 먼저 "모른다고 알아야" 차려서 알려고 할 수 있게 된다.
모르는 줄 모르고, 제대로 다 안다고 알고 있으면 더 알려고
하겠는가?
아무리 모른다고 알고 더 자세히 알려고 노력하여도 미흡할
수 밖에 없는데도 말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