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已往),
이미 가 버렸다, 이미 끝 났다, 이미 정해 진, 이젠 어찌 할 수 없는 등등의 뜻 으로 쓰이는 것 같다.
이미 바꿀 수 없게 된 일에 사람의 선택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오직 그 속에서 그대로 살아 갈 수 밖에 없는 사실(육체)적 측면이다.
현재 이후로는 바뀔 수 있지만, 현재 이전에서는 바뀔 여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온갖 선택이 가능한 의식적 측면이다.
현재를 부인하거나 인용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과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미래를 향하여 낙관적으로 전망하거나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상의 그 어떤 선택도 하거나 하지 않을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사람은 그 누구도 현재로만 살아 가고, 현재로만 살아 갈 수 밖에 없다.
과거로 되 돌아 가 살 수도 없고, 미래로 미리 가서 살 수도 없다.
그렇지만, 사람의 의식계(삶에 관한 의식, 의식적인 삶)에선 그렇지 않다.
과거에 살던 때로 돌아 갈 수도 있고, 미지의 상상계로 가서 살 수도 있다.
물론, 육신이 실제로 가는 것이 아니고 의식계 내부에 그런 것을 만들어(떠 올려) 놓고서 구경하는데 불과하지만....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가 전무한 것이 이왕지사인 현실로서, 그냥 그 속에서 살아 가는 것 이외의 그 어떤 선택도 불가능 하다.
반면에 사람에게 거의 무제한의 선택이 가능한 것이 의식계로서, 그건 선택능력을 얼마나, 어떻게 행사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이 알건, 모르건 간에- 선택의 여지가 저절로 정해 지게 된다.
그런데 스스로 감히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인간들의 하는 짓(선택)을 보면 너무나 어이없는 가관이다.
현실(몸)로는 이왕지사 속 에서 살아 가면서, 의식적으로는 그걸 그대로 인정하는 선택보다는 이왕지사 아닌 것과 비교하여 혹은 "좋다"를 덧 붙이고, 혹은 "나쁘다"(싫다)를 덧 붙여서 희노애락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 한다.
이왕지사 자체 때문에 희노애락 하는 게 아니라, 이왕지사 아닌 것(그 것과 이왕지사가 비교, 평가되기) 때문에 희노애락 하면서도 그걸 제대로 모르고, 거꾸로 착각하고 있으니.....
예컨대, 이미 공생하는 배우자는 배우자로서의 선택 문제가 끝났으니 이왕지사의 일부이다.
결혼하면 좋겠느냐, 좋지 않겠느냐는 결혼 이전에나 선택이 가능한 문제였다.
이제 와서 결혼을 잘 했느니, 잘못 했느니 하는 것을 문제삼는다면, 그건 이혼 여부라는 선택을 전제로 해서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결혼을 잘 했느니, 못 했느니 하는 것은 이왕지사를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의식적 선택이지, 현실(몸)의 선택이 아니다.
고로, 결혼을 잘 했다고 희희낙락하는 것 이나, 잘못 했다고 후회하고 비탄에 잠기는 것 모두가 백해무익한 의식적 선택일 뿐 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하는 선택이 어이없는 희, 비극으로 보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현실에다 온갖 의식적 선택으로 오염시키고, 선택의 여지가 거의 무제한인 경우(이왕지사를 포함한 과거나 미래에 관한 의식 다루기)에는 외곬수에 빠져서 선택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 한다.
이러니 아마도 조물주(신?)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이왕의 현실과 미래를 향하여선택이 가능한 실현의 구별을 제대로 알아차려서 사용하는 지혜가 부족하면, 그런 능력이 아예 없느니만 못 하지 않을 까....
그렇게 본다면, 고뇌와 고초에 시달리는 성인들 보다 유아가 더 평안하다 여겨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