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까?
이 일을 할까, 말까?
이 일을 할까, 저 일을 할까?
이러다가 하나의 행위를 선택(또는 제외)하는 것을 행위라 하자.
그런 선택을 하는 자를(것을) 행위의 주체라 하자.
행위의 주체를 창조하여 거느리고 있는, 행위의 주체가 속해 있는 그 무엇을 행위의 주체의 주인이라고 하자.
한 사람에게 있어서 선택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소위 마음이라고 하는- 의식이다.
그 의식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또는 제외)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인- (각 자의) 나 이다.
그 나(정신)를 만든, 거느리고 있는 것을 몸(핵심은 생명) 이라고 하자.
정신은 몸(생명)이 만들어서 살려 놓고 있는 것 이지, 스스로 생겨나거나 스스로 자고, 깨고, 죽기, 살기를 하지 못 한다.
또 정신이 몸에 속해 있지, 몸이 정신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몸(생명), 나(정신), 마음(의식)의 삼자는 일체로 있지만, 위계적 서열과 기능상의 구별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 각 기능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그 본래의 위계가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
본원의 주인인 몸(생명)이, 선택의 대상인 것 처럼 의식된다거나,
주인의 신하로서 선택의 주체인 나(정신)가, 주인을 모르거나 아랑곳 않고 의식에만 종속된다거나,
주인의 삶을 돕는 수단으로서 방법적 선택의 자료를 제공하는 마음(의식)이 마치 주인처럼, 선택조차 무시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야 말로 희극이고, 비극이지.....
여기서 진정한 주체(주인)와 의식적 주체(목적의식)의 거리(?)적 원근의 문제가 제기된다.
비유하자면, 무인도에 사는 한 사람이 외지에서 하인장과 하인 셋을 데리고 가서 부린다고 가정하자.
하인장 아래의 세 하인에게는 감각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구별하는 역할, 하인들끼리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좋겠는지를 구별하는 역할, 주인의 몸(생명)이 건장하고 안전하고 순탄하게 살게 할 일이 무엇인가를 검토하는 역할을 하도록 지정해 주었다.
하인장은 그들 셋을 잘 다스리면서 주인에게 최선의 봉사를 하라고 기능을 부여하였다.
자신의 기능이나 역할은 제 스스로 정하는 것 이고, 하인들의 의견을 어느 정도나 참고할지 여부도 그 스스로 정하는 것 이다.
한 사람의 기능적 구조나 체계가 거의 위의 비유와 같다.
주인(생명체)이 있고, 제 일을 하지만 그게 주인이 하는 일 이라고 의식하(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의식계에 그런 주인의 실존에 가깝게 반영하는 의식이 형성되어 있어야 실존에 가까운 주인을 알 수가 있다.
만약에(실제로는 거의 보편적으로) 의식계에 실존에 가까운 주인의식이 없으면, 어떤 순간에 떠 올라있는 의식의 의미가 주인처럼 존중되니, 그게 바로 (맹목적인) 목적의식이다.
예컨대 "국가를 위해서는 개인의 목숨도 흔쾌히 바쳐야 한다"는 의식이 있다면, 그런 의식의 목적적 대상인 국가가 마치 주인처럼 여겨지게 된다.
반대로 "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본원이고, 핵심이고, 최고인 가치는 몸(생명) 이다" 하는 의식이 있다면,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인간) 생명체를 가벼이 여겨서 죽이는 일은 고사하고 다치게 하는 일 조차 감히 하려고 할 엄두도 나지 않으리라.
이 사람(필자)도 역시 주인(생명체) 아래에 나(정신)와 의식이 있다.
나의 위로 주인이, 나와 나란히 의식이 있다.
그 의식이 주인을 제대로 반영하는지 여하는 내(정신, 관찰자)가 -실물과 사진을 엄밀히 비교해 보듯이- 철저히 살펴야 한다.
주인이 아닌 것이 주인처럼 중요시 되어 있거나, 주인에게 별로 이롭지도 않을 것을 대단히 중요한 것 처럼 되어 있는 의식이라면 내가 그걸 가차없이 부인, 무시, 배척해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과연 그리 해 왔던가?
불가망, 불가능, 주인에게 불이익한 의식 내지는 의식적 대상을 섬기는 것이 마치 진정한 주인을 섬기려는 목적의식인 것 처럼 속고 있었던 것이 그 얼마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