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내가 아는 주체로서, 내를 알려지는 객체로 삼을 길이 없다는 것은 -이해하고 나면- 너무나 쉬운 일 이다.
그렇지만, 이해하지 못 하면 알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 한 일 이다.
그래서, 시대의 고금(古今). 양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저 자신을 찾고, 만나서, 알겠다고 나섰지만
누구도 성공할 수 없을 수 밖에.
게다가 그 일이 성공할 수 없는 원인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으니 헛수고만 크게 하였지....
그래서 "내가 내 자신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구나" 하는 정도로만 알고, 왜 부가능한지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 하였던지,
그 후로는 "생각(生覺)하라, 깨달음(覺)을 내라(生)"고 가르쳤지만, "깨달음"이란 말의 뜻을 또 "말로 가르칠 수 없다",
"오직 스스로 깨달아서 증득(證得)하는 수 밖에 없다"고 하니, 도대체 깨닫기를 하라는건지, 말라는건지....
알지도 못 하는 일을 무슨 수로 하라, 한다는 건지.....,
필자는 아주 쉬운 방법을 하나 제시한다.
자, 심호흡을 한번 하고 지금 부터 내 스스로 무엇이건 해 보자.
단지, 내가 스스로 하고 말고를, 어떻게 하고 말고를 주도하면서 한다는 걸 잠시도 잊지 말고.
그렇게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하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던 일을,
"자, 멈추고 돌이켜 보자" 하고는 "내가 지금 조금 전에 한 일을 되 돌아 보고 있다"고 명확하게 말 하시라.
그 다음엔 지금 무엇을 하고 있건, 그 일을 멈추자 하고는 일단 멈추자 하라.
그런 다음에 지금까지 한 "모든 일을 한 자가 누구냐(무엇이냐)?"를 확인해 보시라.
알고 있는 모든 일을 확실히 알고는, 그 일은 일단 제외하고 남는 게 무엇인가?
바로, 그 일을 한 자가만 남는다. "그게 바로 내 였고, 지금도 여전한 내 이구나" 하는 것이 깨달음, 자각이다.
두뇌에다 스스로 질문이나 명령하는 말을 걸어 놓고, 그 말을 내가 했구나, 그 말과는 따로 -그 어떤 말을 하건 말건-내가 있구나 하는
깨달음(覺)을 만들어 냄(生)을 생각(生覺)이라 한다.
아는 일(知)이, 대상(객체, 他)를 향하여 [후랫쉬]를 비추어 나아 가는 일 이라면, 깨달음(覺)은 내를 향하여 [후랬쉬]를 되돌아 비춤(返照)과
같다.
쉬운 예를 들자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일을 무엇이 하는가?"
그 일을 하는 자는,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는 일"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그 일 모두를 제외하고 나야, 그 일을 한 자를 알 수가 있다.
바로 두뇌 속의 내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자"고 하였음을 망각(忘覺)하지 않았다면.
무언가를 찾는 자는, 그 찾는 행위나 몸 표면에는 없다, 두뇌 속에서 찾자고 명령하고 있으니까.
걱정하는 나를 찾아 보라, 걱정 속에도 없고 걱정한다는 행위에도 없다, 두뇌 속에서 "걱정스럽다는 나"는 보고 알 뿐 이다.
깨달음을 왜 강조하고 권하느냐 하면, 깨닫지 못 하면 착각에 빠져서 내 일을 제대로 못 하기 때문이다.
내가 내 라고 아는 모든 것은 -착각의 소산일 뿐- 내가 아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제외하고 나서 남는 유일무이한 내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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