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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언어를 나룻배라 하는가.

나 아닌 내 2022. 3. 28. 11:27

불가에서,

"말은 강을 건너서 건너편에 닿기 위한 나룻배에 불과하다, 건넜으면 내려 놓아야지, 왜 머리에 이고 가려느냐!?"

하는 힐난성 질문이 있다.

 

그 문장을 읽는 것 정도는 -한글만 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뜻을 알고 실용하기는 쉽지만 어렵다.

제대로 차근 차근 밝혀 나가면 쉽지만, 단숨에 안다고 나서면 알 길이 막히기 때문이다.

 

먼저 "말"이라는 말의 뜻 부터 알아차려야 한다.

"말이 말이지", "누구나 하고 있는 말, 그게 말이지" 하는 상태에 머무는 사람에겐 그게 바로 장애가 된다.

"말이 뭔지 모르겠는데..."하고 알아야 "말이 무엇이지?" 하고 알려는 호기심을 일으키지.....

 

필자는 말을 다음과 같은 뜻으로 정의한다.

1. "사람이 두뇌 속의 의식을 외부에 표현하기 위하여 합의하여 만든 공통의 기호"라고.

2. "그 기호중에 청각적 기호를 언어, 시각적 기호를 문자"라고,

3. "그 말에 세 가지가 있으니 말(협의), 언(문), 어(자)"라고, 

 

위의 3만 설명하고자 한다.

말(협의) : 내(사람의 정신)가 두뇌를 향해 질문이나 명령 형식을 전하는 것. 

언(言과 文) : 두뇌 속 의식을 기호로 변환하여 놓은 것(語, 字)을 바깥에 표현한(된) 소리(言)나 모양(文),

어(語와 字) : 두뇌 속에 어떤 의식을 음성(語) 또는 글자(字) 기호로 변환해 놓은 것,

 

읽었던 글을 써 놓고 혼자서 "제목이 무엇이었지?"라고 묻거나, "인생문답이라고 하자" 하는 게 말(협의)이고,

그렇게 써 놓은 글(문)과 읽는 음성(言)이 언(言文-줄여서 言)이고,

두뇌 속에 기억되어 있는 글자(字)와 음성(語)이 줄여서 어(語)이다.

 

따라서 언어(즉, 속말과 겉말)가 또는 언문(음성과 글자)이 일치되느니 않느니 하는 일이 드물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쉽게 짐작 가능하리라.   

 

말(광의=협의의 말, 언, 어를 모두 포함)의 구조는 크게 다음과 같다.

이름, 서술어, 의미어(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어)의 셋 이다. (보어는 생략한다) 

이름은 술어(감각적 정보인 識을 語로 변환한 것)와 의어(意)를 요약, 압축한 뜻으로 부여한 것 이다.

술어는 기억과 상상으로 이루어 진 여섯가지 정보(색성향미촉어 6識)를 그대로 설명하는 말 이고,

의어는 위 정보의 일부나 집단을 딴 것(들)과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하는 과정을 거쳐서 생성되는 말 이다.  

 

여기까지 이해하게 되면  [성철] 스님의 소위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이라는 뜻도 짐작하기 쉬우리라.

 

1. 사람이 "산(山)"이라고 호칭하는 특정 범주의 [사실]이 있다.  

  그 [사실] 자체는 [있는 그대로]이지, 사람의 작품(?)인 "이름, 서술어, 의미어"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산(사실 그대로)]은 그 산이지 사람이 만든 "산"(이름), 모양과 색갈등 사람이 알고 있는 두뇌 속 정보(識), 그리고

온갖 비교, 평가, 판단, 선택, 결정등 상대적인 사람의 말(意=마음)과 전혀 무관하다.

2. 사람의 두뇌 속에 "산의식(山意識)", 줄여서 "산(山)"이 있다.

그 사람이 알고 있는 산이 바로 그 것이다.

그 누구도 [산] 그대로를 모르고, 단지 "산"만을 알면서, 제 스스로 "산"이 아닌 [산]을 안다고 혼동에 빠진다.

3. [산]은 언제, 어떻게 변하건 오직 그대로(하나)일 뿐이지만, "산"은 사람마다 다르고, 때와 장소에 따라서

멋대로 변하기도 한다.

[산]은 [산]이고 "산"이 아니니 혼동하지 말라는 뜻이 성철 스님의 가르침이라고 본다.

 

여기서의 [산]과 "산"은 사람이 안다는 것 전반에 그대로 적용된다.

일생을 살아도 [자기]와 [배우자] 그대로를 모르고, 자기 두뇌 속 "자기(의식)"와 "배우자(의식)" 말고는

그 이상도, 이외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제가 아는 "자기", "배우자"를 실제 그대로인 [자기], [배우자]라고나 같다고 혼동에 빠진다.

 

이상과 같은 착각과 혼동에 빠져 있다고 알려 줄 수 있는 방법도,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것도

말 이라는 수단과 도구 뿐 이다.

바로, 착각과 혼동의 강을 건너 갈 수단이고 도구가 언어라는 배 말고는 전혀 없다.

 

언제, 어디서, 누구로 부터 어떤 말(소리)을 들었건 귀를 거쳐서 들은 것(言)의 실체는 소리 이외의 무엇도 아니고,

그 뜻(識, 語와 意)은 듣는 이의 두뇌 속에서 형성되는 것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칭찬도 꾸중도, 찬사와 비난도, 호언도 악담도 듣는 이의 두뇌에서 만들어 지는 것 뿐 이다.

 

자, 말을 의사전달의 도구니, 매개수단이니 하지만, 말 에다 뜻(識)이나 의미(意)를 실어 나를 수 있기나 한가?

그래서 아무리 자세히, 정확히 "이러 저러한 뜻으로 너를 우해 하는 말" 이라고 해도, 듣는 이의 두뇌 속에서

"웃기고 자빠졌네 코웃음 나온다" 하는 반응이 형성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러고도 과연 말을 의사전달의 수단이나 도구라 할 수 있는가? 

 

그렇지만, 아무리 필요하고 유익한 배라도 자각하여 혼동에서 깨어 나면 그 언어라는 배는 버려야 할텐데,

그걸 언어 이상의 실체나 효용이 있기나 한 것 처럼 머리 속에 모시듯 중시하면 주종전도가 아닐 수 없다.

허(虛), 공(空), 마음(心), 의식(意識), 유심(唯心), 유식(唯識), 사랑, 행복 등등의 말을

인생운전에 유익한 자료로 활용함이 필요 충분한데도, 그런 언어를 마리 속에 담아 놓고 신주 모시듯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