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듣는 말(글)인지 소리(글자)인지......
"다 저 하기 나름" 이라는 기본형에,
"자기(個人 단위) 하기 나름", "나 하기 나름", "내 하기 나름", "너 하기 나름",
"그 하기 나름" 이라는 것이 있다,
그걸 말(글)이라 하려면 그 뜻이 있어서 알고, 그런 뜻으로 말을 하고(내고)
듣고(해석)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뜻 없는)그냥 소리", 소위 "헛소리"일
뿐 이다.
같거나 유사한 소리를 뜻이랍시고 수십번 반복해도 역시 '헛소리"일 뿐 이다.
그걸 헛소리라고 모르는 사람들중에 대표적인 오인, 오해, 오판이 바로 소위
"동어반복"에 빠진 어리석음이다.
"저 하기 나름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물음에 , "저 하기 나름이라지 않았느냐?."
하는 식으로 답하거나 "남 하기 나름이 아니고"를 그 대답의 앞이나 뒤에 추가하
는 정도로 답하는 식 이다.
그 "저"의 뜻, 그 "저"로 상징하는 두뇌 속 뜻(意識)이 무엇인지 모르는 줄도 모르면서
아는 줄 알고 있으니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지 불문가지 아니겠는가?
모르는 줄 알아야 알려고 나설 수 있는데, 모르면서 아는줄 알고 있으니 말 이다.
"저(제)"는 대체로 다음 세 가지의 뜻 으로 사용되는 호칭이다.
1). 자기라는 사람(타인이 아닌)을 칭한다.
2). 본인의 정신인 [내]가 칭자로서 , 피칭자인 남(他)이 아닌 스스로(自)를 낮춰서
부르는 자칭이다.
3). 본인의 두뇌 속에 형성되어 있는 '나'(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를 칭한다.
자기 아닌 타인을 상대로 말 할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을, 그 사람의 정신을, 그 사람의 두뇌 속 의식을 뜻할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일을 하는 기관이라야 "하기"가 가능하고,
그 "하기"에 따라서 "그 나름"이라는 말을 연결할 수가 있다.
이 사람(자기)에게 있어서 일을 하는 자는 무엇인가?
크게 보자면 이 사람 자체가 일을 한다,
그렇지만, 무슨 일을 왜, 어떻게 하는지 알수 있는 기관은 이 사람중의
대부분을 제외하고 남는 극히 일부에 국한된다, 그게 과연 뭘까?
바로 [내] 스스로(自)이다.
[내]가 온갖 것을 아는 것은, [내]가 아는 일을 한다는 증거이다.
[내]가 잠들어 있으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고, 깨어 있으면 온갖 일을 한다.
그렇지만, [내] 스스로 지어서 하는(自作爲) 일과 짓지 않음으로써(不作爲)
하는 일과 피종적(被從的)으로 하게 되는 일을 양적으로 비교해 본다면 그 결과가
과연 어떨까?
[내] 스스로 [내가 지금,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다]고 알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반면에, 그저 기계적으로 방관, 방임하는 일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마치 무엇에 홀린듯 하고 있는 일도 결코 적지 않다.
자책이나 원망, 그리움이나 미움, 낙관이나 비관, 집착이나 체념 등등의 모두가
피동적인 일 이다.
내가 알고 있으니, 아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엄연하다.
내가 스스로 그 것들을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알고 스스로 알고 주도하는 것이
아니란 것도 확인만 하면 금방 알 수가 있다.
한정된 시간, 자원, 노력을 활용하여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그 나름으로)
자기 인생의 방향, 질, 양이 결정된다.
그 유한인 자원(정신력, 체력, 의식, 자산등)을 사용하여 일 하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의 유일한 정신, 즉 [내] 스스로(自)이다.
[내] 하기 여하에 따라서 이 사람(자기) 인생의 안위, 건강정도, 순탄여하 등등이
결정된다.
사람의 두뇌 속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마음(욕망)이 들어 잇다.
안전이 좋아/위험은 싫어, 건강이 좋아/병약은 싫어, 부유가 좋아/가난은 싫어,
우등이 좋아/열등은 싫어, 강힘이 좋아/약함은 싫어, 명예가 좋아/ 불명에는 싫어
등등.....
그런데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실현하고, 그렇게 싫어하는 것을 멀리하려면
그의 두뇌 속에 "왜, 언제,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문답이
있어야 알고 실천할 수가 있는데, 그런게 스스로 만들거나 배워서 다집하여 없으니
실천할 수가 없고, 하지 않으니 되는 일이 어찌 있겠는가?
그래서 바라기(욕망)만 하고 할 수는 없으니 되는 일이 없고, 그래서 애만, 목만
탈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