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봄(視)"이라 함은,
그 사람의 정신인 "[내] 스스로(自) 주도하여(主) 대상을 본다"는 뜻 이다.
또, "보임(示)"이라 함은,
"보는 자(觀者) 앞에 등장하여 알려지는 봄의 결과"를 뜻 한다.
위의 뜻 그대로만 으로는 봄(視)은 선행하는 원인 행위이고, 보임(示)은
후행하는 결과이고,
따라서 봄(원인)이 있으면 보임(결과)도 있게 마련이고, 보임이 있다면
(그렇게) 봄이 있었다는 반증이라고도 볼 수가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그렇게) 봄"이란 말은, 당연히 "그렇지 않게 봄(또는 그렇게
보지 않음)" 이라는 말과 상대적이다.
단적으로 "자주적으로 봄"과 "자주적이 아니게 봄(피종적으로 봄)"이라고
상대적으로 구별할 수 있겠다.
자, 그렇다면 [내]가 자주적으로 보는 경우와 피종적으로 보는 경우를 어떻게
구별할 것 인가?
[내]가 시선이 가는대로 맡겨두는 정도에 따라서
전혀 맡기지 않고 주도하는 경우와 전혀 개의(介意)치 않고 전적으로 맡겨두는
경우를 양극단으로 하여 그 사이에 정도의 차이지대를 상정해 볼 수 있겠다.
자주적인 정도를 1%에서 100% 까지로 하여 그 사이를 정도의 차이로,
피종적인 정도를 1%에서 100% 가지로 하여 그 사이를 정도의 차이로 하여
살펴 볼 수가 있겠다.
또, 피종적(被從的)으로 보게 되는 경우도
1). 그 어떤 마음(心意)의 개입도 없이 보게 되는 수도 있고,
2), 그 어떤 마음(心意)의 개입 상태에서 그런 마음대로 보게 되는 수도 있다.
자주적으로 보는 경우도,
1). [내] 스스로(自) 주도하여(主) 목적적(누구의 무엇을 위하여), 합리적, 효율적
관점으로 보는 수도 있고,
2). 그런 주도없이 대상(정보와 그에 부가괴어 있는 마음)을 그대로 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위의 2)와 아래의 2)는 그 결과인 보임이 크게 다르게 된다.
예컨대, "이 사람을 상대로 신중히 결정하라고 말 한 갑은 건방져서 미운 인간"으로
보이지만(위 피종적인 2), 그런 말(識)과 그 말에 대한 반응인 마음(意)을 따로
보이게 되는 수도 있다(위 자주적인 2)
이상과 같은 구별의 실익은 무엇인가 하면 다음과 같다.
소위 "보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다.
바로 "보임이 보기 나름으로 (다르게도 포함하여) 정해 진다"는 뜻 이다.
예컨대 타인의 조언(助言)을 "가르치려 드는 것 같아서 나쁘다, 싫다, 그래서 밉다"는
마음(意)을 통하여 보(아)느냐,
"내게 도움이 되라고 해 주는 말이니 그 의도는 좋다, 그래서 고맙다"는 마음(意)을
통(연결)하여 보(아)느냐에 따라서 소위 느낌(감정, 기분)이 전혀 달라지게 되고.
그 것이 평가, 판단, 선택, 결정에 조건으로 작용되어, 그 사람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투자 권유를 "잘 될꺼야" 하는 마음으로 보느냐, 그렇게 잘 될꺼면 제가 하지 왜 내게
권해, 믿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보느냐, "뭔가 속인수가 있는 것 같다"는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개인과 가족, 주변에 까지 엄청난 피해를 초래케
된 경우를 더러 들은 적이 있으리라.
목적적, 합리적, 효율적인 마음을 쓰는 사람과,
무, 맹목적이고 비합리적, 즉흥적인 마음에 끄달리는 사람의 인생이 질적, 양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날지는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