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만족)만 누리고 싶고, 슬픔(불만)은 경험하기 싫다고 한다.
가능하다면 누구라도 그러고 싶으리라.
결론부터 말 하자면 그건 누구라도 충분히 가능하다.
허나, 누구라도 그 비결(?)을 모르면 전혀 불가능 하다.
그 비결이 과연 뭐길래?
기쁨은, 우리의 의식계에 형성된 의미(意)적 이미지(識)가, 그 이상으로 실현되었을 때 발생하는 생체의 화학작용을 정신이 경험하는 것 이다.
기쁨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뇌 속에 -아직은 비현실인- 어떤 이미지(상상의 識)가 형성되어야 한다.
예컨대, 심순애와 결혼하여 살아가는 상상적 모습이 형성되어야 한다.
다음으론, 그 이미지(상상의 識)에 좋겠다, 바란다, 소원이다 등등의 의미(意)가 부가되어 있어야 한다.
나쁘다, 싫다, 바라지 않는다 등등의 의미가 없어야 할 뿐만 아니라, 아무 의미도 없어서도 안 된다.
마지막으로, 그 상상적 이미지와 같거나 그 이상의 정도로 현실에 변화가 발생해야 한다.
그 실현의 정도가 클 수록 기쁨이 크다.
슬픔은, 우리의 의식계에 형성된 의미적 이미지가 실현되지 않았거나, 그와 반대로 실현되었을 때 발생하는 생체의 화학작용(아드레날린 분비)을 정신이 경험하는 것 이다.
슬픔이 발생하기 위해서도 두뇌 속에 기쁨의 경우와 상대적으로 유사한 의식이 형성되어 있고, 그 것이 원치않는 방향으로 현실화 되어야 한다.
그 현실화의 정도만큼 슬픔의 크기도 정해지고....
자, 우리가 경험하는 그 어떤 기쁨이나 슬픔도 이와 같은 요소들이 추호라도 없이 발생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 하리라.....
이상의 분석적 탐구의 결론을 수용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기쁨만 누리고 원하지 않는 슬픔은 경험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으리라.
결론만 말 하자면
기대 가능성(가망)이 있고, 자기 스스로 실현이 가능하고, 실현에 수반되는 시간, 노력, 비용등이 발생하는 결과(순기능과 부작용도 포함하여)에 비하여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이미지(識)만 상상으로 간직하기로 하고, 그렇지 않는 이미지는 상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설사 상상이 만들어 지더라도 신속하게 무가치 내지는 역가치 판단을 하여서 무시하는 것 이다.
기대 가망이 없거나, 스스로 실현할 수가 없거나, 실현 결과보다도 투입(시간, 노력, 비용)이 과다하여 불리하거나, 부작용이 큰 상상에 좋다, 원한다 등등의 의미를 붙여 두고 있으면, 그게 바로 -기쁨의 씨앗처럼 착각되는- 슬픔의 씨앗이다.
그대 기쁨을 누리고 싶으면 기쁨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씨앗(意識)을 품어라.
결코 슬픔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는 환상적인 기쁨의 씨앗을 가지지 마시라.
욕심이 크고 많을 수록 불만, 슬픔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고 많다는 것,
그래서 욕심을 줄일 수록 불만, 슬픔을 덜 경험하게 된다는 말은 맞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그런 소리만 내고 들을 뿐-그 뜻을 모르고 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