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단어들은 서로 상대적이면서 모순적인 단어이다.
상대적이라 함은, 상대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 이고,
모순적이라 함은, 어느 하나이면서 동시에 상대와 같을 수 없다는 뜻 이다.
상대적, 모순적이라는 말 속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서술하는 말(述語)이 아니라,
서로를 비교하여 평가하여서 파생되는 말, 즉 의미어(意語)이다.
위와 같이 술어와 의어가 다르지만, 그 형식으로선 같은 말이기 때문에 사람들에 의하여 혼동되는 일이 허다(거의 대부분)하다.
예컨대 "좋은 홍길동이라는 사람"(홍길동이라는 좋은 사람)을 실제로 보(이)고 있는 줄 알지만,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홍길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그 사람에 대한 시각정보(識) 뿐이다.
그 사람에 관한 정보(識)를 특정의 누군가 또는 일반 사람들과 비교 평가하여 "좋은"이라는 의어(意)가 형성된 것은 내 두뇌속에서일 뿐이라서 결코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것 인데도, 그 말이 그 사람에 관한 정보(識)에 연결되어 마치 실물 또는 그 것과 접촉항여 형성된 정보(識)인양 혼동되고, 그런 의식(意識)적 혼동이 있는채로 실제로 그 사람과 대면하면 그 의식이 그 사람에게 투사, 투영되어 그 사람이 내 의식과 동일한 사람인 것 처럼 착각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좋다하려면, 딴 무엇과 비교 평가되어야만 성립하고(상대적, 의존적),
그런 비교 평가로 어느 하나가 평가, 판단되면 딴 것은 반대되는 쪽으로만 평가. 판단된다.(모순적)
여기서 핵심은 무엇에 관한 평가나 판단의 결론이 아니라, 그 상대가 무엇이냐이다.
그 비교 평가의 상대야 말로 결론이 나오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300만원이라는 "(돈이 많아서) 좋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무엇과 비교하였(되었)기에 그런 결론이 났느냐가 핵심이라야 한다.
고로 무엇을 좋다느니 나쁘다느니, 선이니 악이니, 의로우니 불의니, 이로우니 해로우니 하는 결론이 중요한 핵심이 아니라,
그 것을 무엇과 비교하여 평가하였느냐(그 것이 무엇과 비교, 평가되었느냐)가 중요한 핵심이라야 한다.
특히 사람과 사람끼리 어떤 하나의 대상을 놓고 상대적인 평가가 정반대인 경우도 허다한데, 그럴 때는 누구의 평가가 좋은지, 선한지, 의로운지, 이로운지를 평가할 기준이 무엇인가?
위의 질문은 사회적으로는 물론이고, 개인 관계에서조차 검토는 커녕 제기된 일조차 거의 없더라.
너와 내가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이 상반될 때, 어느 쪽이 실제로 좋을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냐 (그 기준이 무엇이어야 마땅하겠는가)에 관하여 대화나 시도해 보던가?
내 주장대로 하자니 상대가 완강히 반대하고, 상대의 주장대로 응하려니 "너무나 터무니 없어서 할 수 없고",
제3의 타협책조차 검토해 볼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지구상 크고 작은 분쟁, 사고, 전쟁의 원인이 사실은 모두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사람에게 시비호오(是非好惡)등을 판별할 능력이 있어서 그게 오히려 크나 큰 흉기가 된 꼴이다.
사람이 왜(무슨 이유, 무슨 목적으로) 시비호오를 따지는지, 그 필요와 유익성을 탐구해 보지 않아서다.
각자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에서 자기의 삶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를 검토하여,
도움이 되면 좋다(好), 선(善), 의(義), 이(利)라 하자고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 의식으로 만들어 가지겠금 합의하고, 가르치고, 적용하면 쉽게 해결될 문제이다.
유아기 부터 전세계의 어린이에게 이런 교육을 시켜서 그야 말로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사람의 의식개조를 정중히 제안한다.
이미 우매, 편견, 오판에 사로잡힌 기성세대에게선 완전한 개혁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그들도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에는 무관심하지 않으리라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