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것", 다섯 글자로 된 하나의 문장이다.
그 뜻을 (독자에게) 밝히려면 내, 아는, 것 이라는 세 가지로 나누어서 따로, 따로 밝혀야 한다.
첫째 "내"라는 글의 뜻은 아는 주체가 그 자신임을 칭(자칭)함이다.
그의 행위인 아는, 그 행위의 대상인 것과 구별되는 순수한 주체이다.
아는(행위) 일이 없이도 내(주체)가 먼저 있고,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아는 일을 할 수가 있다.
또, 아는 일을 하더라도 대상이 없을 수도 있고, 그래야만 (나중에라도) 아는 대상을 삼을 수가 있다.
고로, 아는 일과 아는 대상은 아는 주체와는 -아무리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는 수가 있어도- 서로 다르다.
비유하자면, 어떤 물건(대상)을 쥐는(행위) 손(주체)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손이 쥐는 일과 상관없이 먼저 있어야 쥐는 일을 할 수가 있고, 쥐는 일이 없더라도 손은 그대로 있는 것 처럼.
또, 손이 쥐는 행위를 할때라야 대상이 되고, 쥐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대상이 되지 않는 것 처럼.
위 비유에서의 손이 바로 "내"와 비슷한 뜻 이다.
둘째, "아는"(知)은 내가 어떤 대상에 마주 대하여 저절로 아는 본래의(타고 난) 기능이다.
이런(타고 난, 본래의)아는 일은 배워서가 아니고, 후천적으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깨어 나 있기만 하고, 내 앞에 대상이 존재하기만 하면 저절로 아는 일이 일어 날 뿐 이다.
다만, 내 스스로 그 아는 일을 더 부지런히 할 수도 있고, 게을리 할 수도 있지만, 그 근본기능을 내 스스로 바꾸거나 고치지는 못 한다.
셋째, "대상"은 내가 아는 대상이다.
구체적으론, 내가 깨어 나 있는 그 순간에 내 앞에 등장해 있는 의식(意識)이다.
의식이니, 이 몸의 두뇌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 안다.(두뇌 속 의식만을 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여기서 잠깐, 첫째의 "내" 정체를 여기에서 언급하게 되는 원인을 밝힐 차례이다.
내가 아는 대상이 두뇌속 의식이라는 것은, 그 것을 아는 내 또한 두뇌 속에 있는 그 무엇이라는 논리적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내가 내 자신을 대상으로 삼아서 알 수는 -논리적으로 불가능 하므로- 없다는 것도 알게 된다.
결국, 내가 아는 대상이 어디에 있는 무엇이냐를 밝힌 다음에, 그 가까운 곳에 있는 단일하고 불변인 그 무엇이 내 자신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 이다.
왜 내가 단일하고 불변이라 하느냐 하면,
주체인 내가 단일하지 않다면 내 일부를 여럿으로 구별하여 알 수가 있지만, 내 자신을 구별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증거가 없다.
또, 내가 불변이라 함은, 내게 알려지는 대상과 내가 아는 능력의 강약은 변하지만, 그걸 아는 내 자신은 항상 여전하다는 것 또한 누구도 부인할 증거가 없다.
간단히 말 해서 내 신체와 의식은 무수하게 변하여도, 그걸 아는 내 자신은 항상 순수한 정신기능으로만 존재한다.
자, 그렇다면 위의 세 가지 중 핵심되는 것은 극명하게 드러났으리라.
"내" 자신이라고.
"내"가 있어야 아는 일이 있을 수 있으니까.
내가 아는 일을 하고 있어야만 그(내가 아는) 대상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 대상에 아무리 "가장, 최고로 소중한" 이라는 비평어(意)가 부가되어 있더라도 그걸 아는 주체인 내 자신보다 주요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내 자신이 아무리 주요해도, 그 정체와 본분을 제대로 알지 못 하면 실리는 커녕 오히려 부작용이 클 수 밖에.
이 사람의 정신, 이 사람의 건강과 안전, 그리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해 갈 자유와 책임을 본분으로 하는 맑은 정신임을 제대로 아느냐, 엉터리로 아느냐에 따라서 이 사람의 인생과 그 안에서의 내 희노애락이 정해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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