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365

깨달음

나 아닌 내 2013. 4. 7. 09:24

사전에서 깨달음을 검색해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온다.

【명사】

(1)

제대로 모르고 있던 사물 본질이나 진리 따위 숨은 참뜻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있게 .

깨달음 과정
스님 오랜 명상 깨달음 얻게 되었다.
어떻게 하면 깨달음 경지 도달할 있습니까?
깨달음 얻기 위해 궂은일 마다하지 않았다.
유의어 깨도
(2)

모르고 있던 사실 뒤늦게 알아차림.

예문

(29개)
진실로 가슴 애욕 버리지 못한다면 영원히 불문 깨달음 얻을 없을 이다. 중급
예전 선비들 초동 피리 소리에도 문득 깨달음 얻었고 금수() 희롱하는 모습에서도 진리 궁구했었다. 중급
사제 불교 가장 근본 되는 교리 깨달음 근본 되는 내용입니다. 중급
눈빛 총기 빛났고, 깨달음 대한 갈망으로 굶주려 있었다. 중급
스님 지난 10 동안 면벽하며 정진 깨달음 얻었다. 중급
경전 공부 마음공부 동시 수행하여 깨달음 구하는 교관 함께 닦는다고 하는 이다. 중급
() 닦는 사람 인연 잊은 내면 관조 통해서 깨달음 얻고자 한다. 중급
큰스님 법문 듣고는 문득 깨달음 얻어 불가 귀의하게 되었다. 중급
미현이의 눈빛 총기 가득찼고 깨달음 대한 갈망으로 굶주려 있었다. 중급
부천 오신 에는 참선 구도 인생 대한 깊은 깨달음 적지하려는 승려들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뜻으로 정립해 보고자 한다.

일단, 깨달음은 "깨", "달", "음"의 합성아라 해 놓고서. 

"깨"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잠에서 깨어 난다는 뜻이 그 하나이고,  (안에 있던 것을)드러 내려고 거죽을 깬다는 뜻이 그 두번째이다.

"달"은 이른다, 도달한다는 뜻 이고,

"음"은 있음, 했음의 예시와 같은 보조어이다.

합쳐서 풀이하자면 "(어둠에서, 잠 에서) 깨어 나서 빛 남에 이르다", "(어둠 속 무지와 혼돈의 껍질을) "깨어 부수어서 있는  그대로를 드러냄에 이르다" 라고 할 수 있겠다.

 

사람의 아는 기능을 "내"라 칭하면서 [내가 아는 것] 이라는 말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내(주체), 아는(주체의 행위), 것(주체가 아는 대상) 이다.

"깨달음" 이라는 말을 위의 세 가지중 어디에 적용해서 보느냐에 따라서

1. 아는 자 스스로의 깨달음,

2. 아는 행위에 관한 깨달음,

3. 아는 대상에 관한 깨달음의 셋으로 구별할 수 있겠다.

 

자기라는 한 사람이 무엇이냐를 알아차리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구도, 참선, 명상의 길을 걸어 왔었지만,

그 찾는 일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는지 제대로 확인하고 찾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심지어는 찾는 자 자신을 찾으려는 불가능한 명제를 안고 헤매고 헛 씨름 하다가 포기하고 만 사람도 있었다.

 

위의 1.2.3 중에 3은 어차피 과학의 소관이다.

두뇌속 의식에 부합되는 것이 실제로 있느냐 여하를 검증하려면 감각적 접촉이나 그 연장인 과학적 실험이 있어야 한다.

두뇌 속에 의식적으로 아무리 정확하다고 추리나 상상을 했더라도 실제로 확인하지 않으면 가상이나 공상에 불과하니까.

 

위의 1.2는 아는 자 스스로의 정체가 무엇이냐, 스스로의 행위(아느 일)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행해야 마땅한가와 관련된다.

위의 1에 관한 깨달음을 자각(自覺), 2에 관한 깨달음을 지혜의 계발(啓發)이라 칭하자.

 

자각은 그 어떤 "아는(알려지는) 것"과도 따로, 오직 내가 홀로 있구나" 하는 걸 알아차리는 것에 더도, 덜도 아니다.

그 이상이라면 순수한 자각이 아니고, 그 이하라면 자각에 이르지 못한 것 이다.

그 이름이 나 이건, 내 이건, 자신이건, 내 아닌 나 이건, 나 아닌 내 이건간에 내게 알려지는 그 무엇도, 그걸 아는 내 자신이 아니다.

 

자각을 함에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나 의식(내, 자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의식)이고, 따라서 그걸 제대로 알아차리기면 자각함에

가장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我)"라는 이름을 내 자신에게 붙이는 것과 내 자신이 아닌 것에 붙이는 것을 구별하여 전자를 자아(自我), 후자를 타아(他我)라 할 수도 있겠다.

자아(自我)는 내 스스로, 타아(他我)는 내게 알려지는 나(내겐 상대이니 남과 같다)를 지칭한다.

이 글을 구상하는 내 스스로는 자아, 필자의 이름이라는 [나 아닌 내], [아무나]는 타아이다.

 

그런데 사람들(그 정신)은 그 스스로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을 모르면서, 제게 알려지는 나(他我)를 아는 자 자신(自我)이라고 알기(사실은 착각) 때문에 자각하려는 동기에서 멀어 져 있다.

내가 아는 것이 내 자신이 아니라고 알아야 내 스스로를 알고자 찾거나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어 자각할 계기를 만날 수도 있을텐데....

 

자각을 하고 나면 내 본분(아는 일)에 대한 깨달음(즉, 지혜의 계발)은 훨씬 쉬워 진다.

누구를 위해서 아는 일을 하게 되어 있는가, 아는 일을 어떻게 수행해야 마땅한가를 깨닫기가 너무나 쉬울 것 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자각하기 전 에는 아는 일을 하거나 말거나, 어떻게 하거나 여하를 내 멋대로(주로 마음대로) 하지 않기가 어렵겠고..

 

"깨달음"이라는 세 글자로 된 단어, 그 뜻을 어떻게 정립하여 활용하느냐, 그 것은 누구의 정신에게나 자유이다.

그렇지만, 그 자유가 과연 선천적인, 불변의, 무제한의 자유일까?

천만의 말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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